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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정박(碇泊)


 

(1)

너 댓 해전이었을까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길에

서 있었지

머릿속은 맨 눈으로 일식을 본 양

하얗게 비어

몽유병에서 방금 돌아온 듯

악몽을 꾸고도 악몽인 줄도 모르고

빈 동공을 바람으로 채우며

유랑의 길을 떠났지

위험하고, 힘들고, 더럽다는 곳엔

언제나 내가 있었지

활자를 지우고, 음표를 지우고

원고지마저 까마득히 지우고

석면가루가 날리면 마셨고

공구리 죽이 튀면 덮어쓰고

제 무덤 파듯 삽질하며

오로지 육체로만 살았지

정신을 상실했다는 사실조차

상실하고 살았지

 

(2)

척박한 황무지

그 폐허의 가슴에도 싹은 트는가?

몽유병 환자가 꿈을 기억해내려 애쓰듯

소금밭에 씨앗을 뿌려 놓고

옛 기억을 기억해내려 발버둥 치던,

유난히 비가 많았던 어느 해 가을날

기타를 안은 당신이 광배를 지고

기적에 실려 내게로 왔지

 

(3)

세상의 끝이 멀다한들 채찍질하여 가다보면

언젠가는 당도할 날이 있다(莫嫌海角天厓遠但肯搖鞭有到時)1

누구나 그러하듯

나도 마음에 이런 기둥하나는 세우고 살았지

거기에 새겨 넣은 좌우명이 좋다는 당신

담박(淡泊), 잔잔한 호숫가에 매어진

한 척의 나룻배처럼 고요하게,

한 폭의 수묵담채화를 닮고 싶은

나의 소망에도 동의를 했지

담박이 지니는 깊이를 이해하는 사람

음악과 시와 야생화만 있으면 살 사람

마이케나스2 살롱처럼

코르넬리아3 살롱처럼

문사철(文史哲)4, 고담준론(高峻談論)5으로 밤을 밝히며

함께 영원까지 갈 사람

나를 위해 기꺼이 나루터를 내어 줄 사람

고된 항해에 지친 나를 정박하게 해 줄 사람

 

호수 같은 당신 가슴에 뱃줄을 묶는다




              주 - 1. 중국 청나라 때의 시인인 원매의 말.

                 2. 로마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핵심참모 마이케나스가 문예 진흥을 위해 열은 살롱.

                        아그리파는 군사, 마이케나스는 문예를 담당하여 문무를 겸비한 제국을 완성했다.

                  3. 로마 역사상 최고의 현모로 추앙 받는 코르넬리아의 살롱.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함

                    공화정 로마시절 농지개혁을 추진하다 무참히 살해당한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4. 전통적인 인문학 분야인 '문학, 역사, 철학'

                 5. 고상하고 준엄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