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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부산 3.1운동 주역 '김반수 지사' 발자취를 찾아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5호 <부산진일신여학교>

[신한국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제(9) 항일여성독립운동가 김반수 지사가 다니던 부산 좌천동에 있는 옛 부산진일신여학교(, 동래여고 전신)를 찾았다. 지금은 기념관으로 쓰고 있는 이 학교는 경사진 높은 언덕에 있었는데 밑에서 걸어 올라가기가 힘에 부칠 정도로 가파른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126년의 역사를 지닌 부산진교회와 마주보고 있는 아담한 건물의 옛 부산진일신여학교(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5) 마당에 서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했다.


     


경사진 언덕 밑에서 바라다볼 때 우뚝 솟아 보이는 2층짜리 건물은 막상 올라가보니 외로운 섬처럼 달랑 건물 하나만 남아 있었다. 예전에 학생들이 뛰어 놀았을 운동장도 있었을 법한데 모두 주택과 교회 부지로 바뀌어 버렸고 지금은 쓸쓸한 건물 한 채 앞에 부산진일신여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라는 팻말 하나만이 세워져 있다. 마당에 느티나무 고목 한그루는 당시 소녀들의 함성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낙엽을 떨군 채 서있었다. 마당이 하도 적어 옛 일신학교전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기념관을 찾은 시각이 낮 12시였는데 아뿔사, 점심시간이라 1시까지 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근처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했다. 1, 정확한 시간에 다시 문이 열렸다. 옛 일신여학교는 2층짜리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1층은 김반수 지사가 다닐 무렵의 교실을 재현한 공간이 있고 2층에는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김반수 지사는 1904919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232번지에서 태어났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은 김 지사의 나이 16살로 부산진일신여학교 고등과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당시 교사이던 박시연, 주경애 선생님은 서울의 3.1만세운동을 알리며 고등과 4학년인 김반수 지사를 비롯하여 심순의, 김봉애, 김복선과 3학년인 김응수, 2학년인 김난줄, 김신복, 1학년 인 이명시, 송명진, 김순이, 박정수 등과 더불어 시위 항쟁을 계획하고 311일을 시위 날짜로 정하였다. 이들은 시위 때 쓸 태극기를 만들었는데 그 옷감을 선뜻 내놓은 사람은 김반수 지사였다.

 

전국에서 31일에 독립만세를 전국에서 부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여, 때는 이때다 싶어 동지인 일신여학교 몇 명이 모여 태극기를 만들어 나눠주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어머님께서 혼수감으로 마련한 옥양목을 어머님 몰래 끄집어내어 태극기를 만들어 만세운동에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김반수 지사 나이 89(1993) 때에 쓴 손편지의 한 구절이다. 손편지는 이어진다. “내가 7살 때 보통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아침 조례를 할 때 일장기가 게양되는 것을 보고 상급생 언니들이 땅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었지요. 저는 어려서 무엇 때문에 저런 일을 하는가 싶어 의아하게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신여학교로 진학하니 나라 없는 설움이란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하나 쯤이 아니라 나하나 만이라도라는 생각이 내 뇌리를 스쳐갔습니다.” (이하 편지 전문은 기사 끝에 싣는다)


    

 

그래서 김반수 지사는 혼수감으로 마련해둔 귀한 옷감인 옥양목을 기꺼이 태극기를 만드는 데 써버리고 만다. 이들은 삼엄한 왜경의 눈을 피해 기숙사 벽장의 창문을 가리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태극기 100여 장을 들고 311일 저녁 김반수 지사는 부산진일신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좌천동 일대에서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면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만세 현장에는 일본헌병들이 총 끝에 칼을 꽂고 뒤쫓고 있는 상황이었다. 김반수 지사는 필사적으로 도망쳐 함께 시위를 한 박정수 집에 잠시 숨었으나 이내 잡혔다.

 

왜경이 박정수 집을 뒤진 것은 부산진일신여학교 일본인 교사 사카이(坂井)의 고자질 때문이었다. 평소 사카이는 김반수 등 여학생들이 교내에서 수군거리는 것을 의심하여 미리 이들의 집을 확인해두었다가 형사인 오빠에게 알린 것이었다. 사카이 형사에게 잡힌 김반수 지사는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을 선고 받고 고난의 옥살이를 살아야했다. 그 옥살이의 고통을 김반수 지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나는 어려서 직접 형무소로 와서 심문하고 난 뒤 40여 일만에 공판정에서 용수(죄수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머리에 씌우는 둥근 통 같은 기구)를 머리에 쓰고 허리에 줄을 매고 나갔습니다. 판사의 물음에 나이가 어려도 겁내지 않고 우리나라를 찾기 위하여 태극기를 만들어 들고 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더니 징역 6개월을 구형받고 그 며칠 후에 보안법위반이라는 죄명으로 판결을 언도 받았습니다.

 

언도를 받고 난 뒤부터는 콩밥을 먹었습니다. 막상 콩밥을 먹어보니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중간줄임) 복역 중에 제일 고된 것은 콩밥을 못 먹어서 영양실조에 걸려 혼난 사실과 그때가 여름이고 보니 목이 말라 물이 먹고 싶어도 물을 마음대로 주지 않으므로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또 밤에 누워 잘 때도 방이 비좁아 더워서 혼난 일과 그 외의 많은 여러 사실들이 있습니다.(뒷줄임)”<동래학원80년지(東萊學園八十年誌), 1971, p191~193>

 

15살의 어린 소녀 김반수의 감옥생활은 끔찍한 것이었다. '형무소 인권'이란 말이 존재할 수 없었던 일체침략기 형무소의 상황은 김반수 지사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어윤희 (1880 ~ 1961) 지사의 경우는 옷을 홀라당 발가벗겼다고 하니 그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311, 만세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19193월 말 김반수 지사는 부산진일신여학교 7회 졸업생으로 졸업을 할 수 있었지만 구속으로 1920년 봄에 가서야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부산진일신여학교기념관에는 이 학교 출신 여성독립운동가들의 당시 사진과 활동 상황 등이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댕기머리를 한 가녀린 여학생이지만 조국 독립에 한 목숨을 내놓겠다는 결의로 만세운동에 당차게 참여했던 김반수 지사의 학창시절은 그렇게 기념관 건물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김반수 지사는 정부로부터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음)


 

아쉬운 것은 기념관의 전시물이 전부일 뿐 이들의 활동을 적은 작은 책자 하나 마련해 놓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옛 부산진일신여학교야말로 부산, 경남 지역 3.1만세운동의 발상지일 뿐 아니라 부산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으로 역사적인 곳이다. 이곳 출신의 여성독립운동가로는 김반수 지사(대통령표창, 1992), 박차정 (독립장, 1995) , 심순의(대통령표창,1992), 김응수(대통령표창,1995), 이명시(대통령표창, 2010) 등이 서훈자이며 아직 서훈에 이르지 않는 분들도 많다.  


기념관 입구에는 ‘2006623일 기념관 복원 준공이라는 표석이 새겨져 있지만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지금까지 방문객에게 나눠 줄 1장짜리 전단하나 마련 못하고 있는 옹색함이 왠지 아쉬웠다. 물론 누리집(홈페이지)도 없다.

 

기념관을 나오며 시퍼런 왜경의 총부리에도 두려워 않고 조선독립을 외쳤던 부산진일신여학교 여학생들의 뜨거운 조국애가 너무 과소평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진일신여학교기념관

  부산 동구 정공단로17번길 17 (동구 좌천동 768-1)

  입장은 무료이나 12시부터 1시까지는 점심시간으로 문이 잠겨 있음

  전화 : 051-635-7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