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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아오지탄광에서 민족혼을 심어준 "조애실 지사"

[3.1운동 100돌 100인의 여성독립운동가 ] <5>
독신의 삶을 산 조애실 지사가 다닌 송암교회 이규남 장로를 만나다

[신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조애실 장로님은 제가 잘 압니다. 후손은 없으시지만 송암교회에 다니셨으니 교회에 오시면 자료를 드리겠습니다.” 수유리 송암교회의 이규남 장로와 통화를 마치고 조애실 지사(1920.11.17.~1998.1.10.) 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지난 10(일요일) 송암교회를 찾아간 날은 아침부터 흰 눈이 펑펑 내렸다.

 

이규남 장로는 12시가 넘으면 예배가 끝나니 그 시각에 맞춰 오면 좋겠다고 했지만 전화를 끊고 나니 조애실 지사님이 오랫동안 다니던 교회로 찾아가는 것이니만치 예배에 참석하는 게 좋겠다싶어 눈 속을 뚫고 2부 예배가 시작되는 오전 11시에 도착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조애실 지사는 1965년부터 199811078살로 숨을 거두는 날까지 33년간 수유리 송암교회에 다녔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의 송암교회(현 담임목사김정곤)1962년 한국신학대학 강의실에서 교수와 직원들 그리고 그 가족들이 모여 만든 교회로 조애실 지사는 초창기부터 어머니와 함께 송암교회에 다녔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 간 조애실 지사에게 있어 교회는 친정과 같은 곳이었을지 모른다. 인생 후반기에 원로 장로로 추대되어 그 누구보다도 봉사활동에 앞장섰던 조애실 지사의 숨결을 송암교회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지난 10(일요일) 2부 예배가 시작되는 송암교회 2층 예배당 구석에 앉아 교인들이 부르는 찬송가와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예배당은 2층과 3층으로 탁 터진 구조였는데 어림잡아 200여명 가까운 신자들이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조애실 지사도 숨지기 전까지 주말마다 예배당에 나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특히 조애실 지사는 평생 동안 주일이면 가장 먼저 예배당에 나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성전의 촛불을 켰다고 한다.

 

빼앗긴 조국의 암울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민족혼을 심는 일에 앞장서다 왜경에 잡혀 뼈가 부스러지고 살점이 튕겨나가는 고문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 마음으로 촛불을 밝혔으리라. 기자가 예배당을 찾은 날에도 성전에는 촛불이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조애실 지사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한 이규남 장로와 만났다. 나는 대뜸 첫 질문을 건넸다.

 

조애실 지사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건강은 나쁘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너무나 철없는 질문이었다.

 

말도 마세요. 독립운동 당시 형무소에서 받은 고문으로 평생 병을 달고 사셨습니다. 그 고통은 아무도 모를 겁니다. 너무나 큰 고통의 시간을 보내셨지요.” 이규남 장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조애실 지사가 쓴 두 권의 책과 자신이 집필한 667쪽의 교회 역사 책 송암교회 1962년부터 44년사, 2006을 한 권 건네주었다. 조애실 지사의 책은 자전적 수상집(隨想集) 『차라리 통곡이기를과 시집 출범(出帆)이었다.


여기 애원이 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몸부림이 있습니다

여기 결박이 있습니다

주님을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말씀을 귀 담을 수 없는

병마의 결박이 있습니다

 

이 한 알의 약에다 당신의

피묻은 자비의 손 얹으사

효험을 주옵소서 (뒷줄임) -조애실 시집 출범』 (1979)차라리 통곡이기를가운데-

 

얼마나 육신의 고통이 컸으면 이러한 시를 썼을까? 조애실 지사가 평생 육신의 병마와 싸우면서 지낼 수밖에 없던 일은 그의 자서전에 11획도 틀리지 않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봐 조애실..., 너무도 똑똑하고 지독한 년이다. 하루에 담배 한 갑 태우던 내가 네년을 조사하면서 매일 두 갑씩이야! 묻는 말 이외는 입을 다문 채 귓구멍으로는 국어(일본말)를 들으면서 답은 조선말로 하는 걸 보니 지독한 년이군. 너의 외가는 경상도고 친가는 함경도라서 기질이 세찬 부모들 사이에 태어났으니 짐작은 간다마는 안 될 일이지, 천하장사도 고문을 견뎌내진 못했으니까...(가운데 줄임) 이런 짓 저질러 놓고 서울로 도망쳐 와서 겁도 없이 또 <비밀독서회>를 조직해? 앙큼하고 지독한 년 같으니...” 차라리 통곡이기를(1977, 조애실 수상집, 41나의 옥중기가운데)

 

나는 피를 토하며 적어 내려간 조애실 지사의 책을 차마 다 읽어내려 갈 수 없었다.

 

분하다. 옷을 입고 고문을 당해도 분한데 갓 스물이 조금 넘은 박 속 같은 알몸을 불구대천지 놈들 앞에서 드러낸 자체만도 입술을 깨물고 죽고 싶은 치욕이었다차라리 통곡 이기를(1977, 조애실 수상집, 38나의 옥중기가운데)

 

조애실 지사는 불구대천의 왜놈순사 앞에서 알몸으로 극한 고문을 받았다. 특히 알몸으로 <비행기 1>라는 이름의 극한 고문을 받으며 조애실 지사는 죽음 직전까지 갔다고 술회했다. 온 몸을 나무에 묶어 놓고 비틀어 버려 뼈가 살에서 튕겨 나오는 고문 속에서도 조애실 지사는 정신을 놓지 않았다.

    

 


하나님 아버지, 나라를 사랑한 죄, 민족을 사랑한 죄, 이것 밖에 여기서 악형을 당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죽지 않았듯이 앞으로 어떤 고문이 닥치더라도 버틸 수 있는 힘을 제게 주옵소서”   차라리 통곡 이기를(1977, 조애실 수상집, 38나의 옥중기가운데)


 조애실 지사가 고문으로 평생 당한 고통을 이겨낸 의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힘이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함경북도 길주(吉州)가 고향인 조애실 지사는 운수업을 하는 아버지와 바이올린 솜씨가 뛰어난 어머니를 둔 당시로서는 상당한 인텔리 집안의 딸이었다. 경성 유학을 마칠 정도로 아버지는 깨어있는 분이었다. 특히 외할아버지는 조정의 문관 출신으로 당시 이완용의 악행을 임금께 직소하는 하였는데 결국 그것이 화근이 되어 이완용 일파에 의해 강화도 유배 길에 올라야 했고 가족은 함경도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어머니 김영순(金永順) 여사 역시 길주의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분이다. “함경북도 길주의 31운동 만세편을 보면 17살의 규수 김영순이 수백 명 만세대열에 앞장섰다가 일본헌병이 권총을 발사하는 것을 간신히 피해 마방집 말을 풀어 타고 산으로 도망쳤다. 이는 옛날 서부활극 같은 장면이다. 바로 그녀의 핏줄을 타고 그 투쟁정신을 이어 받은 정렬의 여인이 조애실이다.” - 조국을 찾기까지, 최은희 지음 한국여성활동비화가운데-

 

한국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 선생은 조애실과 그의 어머니 김영순을 그렇게 썼다. 조애실 지사의 어머니 김영순 여사는 당시 처녀의 몸으로 만세운동을 하다 쫓기는 몸이 되자 마방집 말을 타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추위와 굶주림 속에 놓여있을 때 조애실 지사의 할머니는 자신의 딸 김영순을 찾아주는 사람이 총각인 경우에는 딸과 결혼 시킬 것이며 이미 결혼한 사람이라면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는 방을 내걸었다.

   

그렇게 해서 마방집 아들 조창길(趙昌吉)은 산속을 뒤져 다 죽어가는 김영순 처녀를 찾아내어 결혼을 하고 조애실 지사를 낳은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독립운동 집안에서 성장한 조애실 지사는 1932년 명천읍(明川邑) 보통학교(공립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조애실 지사는 스무살 무렵인 19401월 중순 함경북도 아오지(阿吾地)탄광의 광산촌에 거주하면서 야학을 세워 부녀자들에게 문맹퇴치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가 광산촌으로 들어가게 된 계기는 호남지방에서 탄광촌으로 이주하는 동포들을 만나면서 부터였다. 그들이 일본 헌병에게 노예 취급 받으며 짐승처럼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동포들의 눈을 뜨게 하자, 귀를 열어주자, 그렇게 얻어맞아 가면서도 호소할 곳이 없는 저들을 무지와 천대와 기근에서 건지자는 각오로 탄광촌에 들어가 야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민족혼을 심고자 부녀자들을 모아 한글과 역사 공부를 시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경의 끊임없는 감시망을 피하지 못한 조애실 지사는 아오지 탄광에서 부녀자들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19413월 왜경에 잡혀 3개월간의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아오지 경찰서 유치장에 끌려간 조애실 지사는 일본인 형사의 심문을 받아야했다.

 

평양전도대의 한사람이냐?”

아니다

사회주의자냐?

아니다

너의 배후에는 어느 교회, 아니면 무슨 애국단체가 있어 너를 돌봐주고 있는 게 맞지?”

아니다. 나는 나 혼자 자비로 학용품을 사서 문맹퇴치를 하고 있다

당치않다. 어린 네가 혼자했다는 말을 누가 믿냐. 어서 배후를 대라

 

일본인 형사들은 조애실 지사가 배후 없이 혼자 야학을 한다는 말을 곧이듣지 않고 여러 날을 굶기고 심한 매질을 해댔다. 열악한 유치장에는 날파리가 새까맣게 얼굴에 달라붙는데다가 물이 오염되었는지 심한 설사까지 겹쳐 조애실 지사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자 왜놈 형사들은 조애실 지사가 장티푸스에 걸린 줄 알고 전염될까봐 조애실 지사를 방치하는 틈을 타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와 살아났다.

 

그 뒤 1년간 몸을 추스른 조애실 지사는 왜경의 감시를 피해 1942년 경성(서울)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서울은 생면부지의 땅으로 아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 먹고 잘 곳도 없는 상황에서 그가 찾아간 곳은 교회였다. 조애실 지사는 서울 독립문성결교회에서 또 다시 <기독학생 비밀독서회>를 조직했다. 아오지 탄광에서 조선인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길러주던 민족혼과 애국사상 교육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애실 지사는 전영신(全榮信) 등 부녀자들에게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그 역사와 문자를 모르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하며 단종애사(端宗哀史), 이차돈(李次頓)의 죽음과 같은 책을 통해 민족의식을 심어 나갔다.

 

특히 일본어 상용이 강제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글을 못 읽고 한국말을 못한다면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니 한국어를 배워야한다고 하면서 비밀독서회와 한글교육을 재개하다가 또 다시 왜경에 잡혀 19454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 집행유예 4년형을 언도받았다.

 

다행히 몇 달 뒤에 광복을 맞아 풀려나긴 했지만 감옥에서 받은 고문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조애실 지사는 항상 몸에 자살을 위한 약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얼마나 육신의 고통이 심했으면 차라리 죽음으로써 고통을 잊으려고 했을까? 그러한 말에 가슴이 쓰라림을 느낀다. 하지만 그러한 육신의 고통을 견디게 한 것은 그리스도의 힘이었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광복 후에 조애실 지사는 백범 김구 선생이 주도한 한보사에 입사하여 문화부 기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에 시 <새벽 시단>으로 문단에 데뷔한 이래 52년간 시인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여느 시인들이 소재로 삼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건 그의 고백에서도 드러난다.

 

무슨 해명이 필요할까마는 이미 흘러간 시공 속에 시대적 배경이 반영되어 있어 나의 생애에는 8.15해방 전후와 625 동란의 글들을 빼놓으면 아무 것도 없다.” - 조애실 시집 출범, 후기 130- 

 

조애실 지사의 한 평생을 잘 요약한 글이 있어 소개한다. 1979년 출판한 시집 출범의 머리말을 쓴 구상 시인의 글이다.

 

조애실 여사하면 우선 그의 세 가지 두드러진 면목이 떠오른다. 하나는 멋과 정한(情恨)을 지닌 조선 여인의 면목이요, 다른 하나는 강렬한 민족의식을 지닌 여류지사적 면목이요, 또 하나는 열렬한 크리스찬으로서의 면목이다,”라고 했다.

 

한마디로 조애실 지사는 독립운동가요, 시인이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조애실 지사는 196731여성 동지회를 창설하여 부회장과 총무를 역임했으며 도예에 입문하여 1972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신세계화랑에서 옹기전을 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하회가면극에 심취하여 가면을 손수 만들고 하회가면극에 관한 논문도 썼다.

 

무엇보다도 조애실 지사는 효녀였다. 독신으로 살면서 어머니 김영순 여사를 평생 모셨으며 조카들의 뒷바라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독립운동 시절 모진 고문으로 육신의 고통 때문에 치사량의 진정제를 품고 다니면서도 신앙의 굳은 반석 위에 서서 317회나 간증 집회를 여는 열성을 다하기도 하였다.

    

 

조애실 지사는 78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 살던 집과 지니고 있던 패물 등을 모두 정리하여 송암교회에 장학기금으로 내놓아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정부는 1990, 조애실 지사의 독립운동 공훈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고양시 일산에서 조애실 지사가 33년간 다니던 서울 수유리의 송암교회까지 가는 길에는 쉴 새없는 함박눈이 퍼부었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교통이 혼잡하여 썩 달갑지 않지만, 나는 그 흰 눈 내리는 길을 걸어 교회를 나왔다. 평생을 독신으로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한 열정을 불태웠던 한 송이 흰 백합꽃과 같은 삶을 산 조애실 지사를 기리듯 흰 눈은 그렇게 대지 위에 소복하게 쌓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