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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화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우리 엄마와 준호아버지 / 전옥선

석화 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20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나와 준호, 란이 우리 셋이 한 마을 소꿉친구들인것처럼 우리들의 아빠, 엄마들도 한 마을친구들이셨다. 며칠 전 란이엄마 칠순잔치소식을 듣고 나는 한달음에 달려갔더니 준호도 와있었다.

 

란이엄마 칠순잔치는 풍성하게 잘 차려졌다. 한잔 거나해진 하객들이 어르신의 만년장수를 빌며 권커니작커니 하면서 분위기를 한껏 띄워 올렸다. 손자, 손녀들과 함깨 덩실덩실 춤을 추는 란이엄마를 바라보며 나도 응당 기뻐해야겠지만 어쩐지 가슴이 짠해 지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당황한 나는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들고 일어섰다.

 

그런데 문가에는 준호가 먼저 나와서 담배를 피우고 서있었다. 저 친구의 심정도 나와 마찬가지이리라. 란이엄마는 칠순잔치를 펼치는데 같은 년배였던 준호아빠와 우리 엄마는 벌써 이십년 전에 하늘나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기쁨이 넘치는 란이엄마의 얼굴에서 우리 엄마의 모습을 떠올린 것과 마찬가지로 준호도 너무 일찍 돌아가신 야속한 아버지가 생각나 더 앉아있지 못했으리라.

 

준호는 나를 보더니 어색한 웃음을 한번 짓고는 말도 없이 돌아서 가버렸다. 그의 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나도 가슴을 눅잦히며* 준호가 간 반대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 엄마와 준호아버지는 젊은 시절 련인사이(연인사이)였다. 한마을에서 함께 자란 두 분은 낮에는 생산대일을 하고 저녁이면 문예활동준비를 하면서 청춘을 불태웠다. 다부진 몸매에 항상 박력 있는 움직임으로 마을사람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아온 준호아버지는 하모니카도 잘 불고 손풍금도 잘 치는 멋쟁이총각이셨다.

 

우리 엄마는 동그스럼한 얼굴에 약간 큰 쌍겹눈으로 사람들과 말할 때는 항상 가쯘한(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으셨다. 무슨 일을 하나 일등을 해야만 직성이 풀릴 만큼 승벽심*이 강한 엄마는 김매기, 모내기철이면 항상 마을사람들의 앞장에 섰고 노래도 잘 불러 마을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셨다.

 

손풍금 잘 타는 준호아버지와 노래 잘 하는 우리 엄마, 이런 두 분이 선남선녀로 한 동네에서 살았으니 마을사람들은 천생연분이라고 혀를 끌끌 찰 때 우리 외가집은 폭풍전야의 분위기였다. 준호아버지네는 부모 두 분 모두 불구자이고 아래에 올망졸망 동생들이 셋이나 되는 특별구조대상이다. 서발막대* 휘둘러도 거칠 것 없는 집에 누가 귀한 딸을 시집보낸단 말인가? 준호아버지가 큰마음을 먹고 우리 외가집에 찾아오니 외할머니는 결사반대하셨고 외할아버지는 준호아버지를 쫓아내셨다고 하니 참으로 가 엾는 부모마음, 우리 엄마만 눈물로 세상을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때 마을에서 생각 밖의 일이 생겼다. 우파분자로 투쟁 받던 분이 어느 날 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것이다. 아무래도 두만강을 건너 외국으로 가버린 것 같다고 했다. 도주! , 이런 길도 있었구나. 두터운 구름장 같은 캄캄한 절망이 짓누르던 우리 엄마와 준호아버지의 가슴에는 한 가닥 희망이 비쳐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두 분은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빈 두 주먹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사랑이란 이름만으로 두만강를 향해 걸어가는 두 남녀의 모습을 상상하려니 참 드라마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내 국경선에 다다른 그들, 사품치는* 두만강 푸른 물결을 마주 서서 두 분은 서로 두 손을 꼭 잡았을 것이다. 이 강을 건너가면 모든 번뇌가 가셔진 사랑의 새 천지가 열릴 것이다. 지금까지 꿈꾸어왔던 사랑의 보금자리가 현실이 되여 이 두 청춘남녀를 따뜻하게 품어줄 것이다.

 

하지만 준호아버지는 고개를 돌렸다. 불쌍한 부모님과 아직 어린 동생들을 생각하니 차마 저 혼자만 잘 살겠다고 저 강을 건널 수 없으리라. 두 분은 이틀 만에 고향마을에 다시 나타났고 온 동네를 활딱 뒤집어 놓은 두 분의 가출은 싱겁게 막을 내렸다. 그 후 엄마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소원대로 타향 먼 곳으로 시집을 갔다.

 

갑돌이와 갑순이노래처럼 두 분은 서로 사랑하면서도 서로 다른 대상을 만나 결혼했다. 우리 엄마가 시집가버리자 준호아버지도 그저 부모만 모시면 된다는 조건으로 녀자를 만났을 때 참! 세월을 탓해야 하나, 운명을 탓해야 하나, 준호아버지는 얼마나 가슴쓰린 눈물을 흘렸을까?

그즈음 타향에 시집갔던 우리 엄마가 남편을 잃고 두 살 난 딸애를 업고 고향마을에 다시 나타났다. 갈 데가 없어 본가에 돌아왔건만 빽빽거리는 딸애를 데리고 식솔이 한구들이나 되는 본가에 얹혀살려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마침 자식 없이 살다가 리혼한 우리 아버지가 관심을 보이자 급급히 살림을 차리셨다.

 

아버지를 만나 엄마는 내리 딸 셋을 낳았다. 가난할 대로 가난한 그 세월이었지만 집안에 세 딸들이 오글거리며 웃고 떠드니 아버지는 살맛이 나셨는지 열심히 일하셨다. 보통 키를 넘을 만큼 큰 키에 부리부리한 두 눈을 가져 사람들에게 아주 선한 인상을 주는 아버지는 성격도 아주 조용하여 마을사람들이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 할 만큼 착한 분이시다. 이런 아버지를 엄마는 언제나 존중했고 아버지의 밥상에도 신경을 많이 쓰셨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쯤이라 기억된다. 외가에 갔다가 막내외삼촌한테서 처음으로 준호아버지와 우리 엄마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아버지보다 한참 젊으시고 능력이 좋으신 준호아버지, 늘 깨끗한 옷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공소사로 출근하는 준호아버지, 그분에 비하면 우리 아버지는 너무나 볼품이 없었다. 항상 농사짓느라 흙이 게발린* 옷을 걸치고 소수레나 몰고 다니는 시골농부인 우리 아버지그때부터 나는 은근히 엄마한테 신경을 쓰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학교가 늦게 끝나 발걸음을 재우쳐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원래 학교일에 적극적이다 보니 날이 어둑어둑해져서야 길에 나선 것이다. 아직도 집에 도착하려면 반시간은 푼히* 걸어야 했다. 문득 앞에서 부지런히 걸어가시는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흥분에 들떠 엄마를 부르려는 찰나 자전거를 탄 준호아버지가 윗마을로부터 내려오시다 면바로* 엄마 곁을 지나가게 될 줄이야. 작은 시골길에서 두 분이 만나다니. 내가 바로 뒤에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준호아버지는 자전거에서 내리셨다. 엄마는 흠칫 발걸음을 멈추더니 종종걸음을 치셨다. 엄마와 말을 거는 준호아버지한테 손사래를 치는걸 보면 빨리 먼저 가라고 재촉하는 것 같다. 나는 준호아버지가 엄마를 남겨두고 저 혼자 훌쩍 가버릴가 봐 긴장되었다. 길에 혼자 남겨진 엄마가 너무 불쌍할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엄마가 준호아버지의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타면 더 가슴이 아플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 늦은 시간에도 논판에서 궂은일을 하시는 아버지를 생각을 하면 엄마는 절대 그러시면 안 되는 거지.

 

나의 모순되는 심리와는 상관없이 두 분은 내 앞에서 나란히 걸어가셨다. 준호아버지는 자전거를 밀고 엄마는 빠른 걸음을 맞춘다. 얼마큼 걸었을까 마을 앞에 이르러 두 분이 각자 제집으로 가는 골목길로 꺾어들자 나는 종주먹을 쥐고 달려가 엄마의 팔을 덥썩 잡았다. 불시에 뜨거운 눈물이 울컥 치솟아 올라 아무 말도 못했다. 가시나가 이렇게 늦게 오냐고 엄마가 소리친다. 그러는 엄마를 보면서 자꾸 눈물이 흐른다. 어둠이 깔려 엄마는 내 눈물을 보지 못 한다. , 오늘 우리 엄마가 너무 불쌍하다.

 

세월이 흘러 우리 세 딸들이 하나둘 집을 떠났다. 농사일이 힘들어 그만 둘가 말가 할 무렵 엄마가 너무 아프시단다. 급급히 큰 병원에 모시고 갔더니 위암말기였다. 이제 겨우 오십이 넘으셨는데? 나는 울면서 병원을 오르내렸다. 수술 받고 약을 쓰면 꼭 나을 수 있어! 나의 위안에 엄마는 서글프게 웃으셨다.

 

수술하고 고향집에 돌아오신 엄마는 병마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너무 아프셔서 벽을 허비는데 손끝에서 피가 막 흐른다. 엄마의 림종이 가까워올수록 준호아버지가 우리집에 드나드는 차수가 잦아졌다. 아버지는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셨다. 어느 순간부터 세분이 이런저런 지나온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셨는데 그 아픈 와중에도 엄마의 얼굴에 약간씩 비껴가는 미소를 놓치지 않고 나는 볼 수 있었다.

 

초봄, 엄마는 홀연히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그런데 바로 그해 가을, 엄마보다 한 살 아래이셨던 준호아버지가 52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간암말기 진단을 받더니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결연이 이 세상을 떠나실 줄이야.

 

두 분이 우리 곁을 떠나고 이십여 년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때 마을어르신들이 하시던 말씀이 잊히지 않고 가끔씩 떠오른다.

 

저 둘이 저 세상에 가서 잘 살려나보오. 저리 급히 따라가는걸 보니

 

오늘에 이르러 준호나 나나 모두 우리네 엄마, 아버지의 그때 나이가 되였다. 란이엄마 칠순잔치에서 마주친 준호와 나,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얼마나 당신들을 그리워하는지 아실까. 길을 걷다말고 나는 고개를 돌려 준호가 사라진 거리를 한참 바라보았다. 저 멀리 하늘이 높게 그리고 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낱말풀이 

* 눅잦히며 : 눅잦히다 = 가라앉히다, 누그러뜨리다

* 승벽심(勝癖心) : 남과 겨루어 이기고자 하는 마음

* 서발막대 : 매우 긴 나무나 나뭇가지의 긴 도막을 강조하여 이르는 말

* 사품치는 : 사품치다 = 세차게 부딛혀 움직이다

* 게발린 : 게발리다 = 게바르다(지저분하게 바르다.)의 입힘꼴(피동형)

* 푼히 : 푼하다 = 모자람이 없이 넉넉하다

* 면바로 : 바로 앞으로 마주보이는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