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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퇴계, 위대한 학자일 뿐 아니라 따뜻한 인간이었다

[서평]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도서출판 소나무, 김영두 옮김》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90]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 13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성리학의 핵심 개념인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사단칠정 논쟁은 8년간)을 벌인 것은 우리나라 철학사에 유명한 논쟁이라,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지요?

 

이 두 대유학자 사이에 오간 편지를 김영두 선생이 뒤친(번역)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도서출판 소나무를 읽었습니다. 퇴계와 고봉은 오고 간 편지 속에서 딱딱한 철학 논쟁만 펼친 것이 아니라, 진실로 서로를 아끼고, 존경하고 그리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단칠정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태극, 상례(喪禮)나 제례(祭禮), 왕실의 전례(典禮) 등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더군요.

 

퇴계가 우리나라 최고의 성리학자라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겠지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퇴계가 학문적으로만 최고의 성리학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존경받을 만한 스승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퇴계는 고봉보다 26살이나 연장자로, 고봉은 퇴계의 아들뻘, 그것도 일찍 결혼하던 조선에서는 몇 째 아들뻘에 불과합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 이들이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할 때 퇴계는 이미 조선에서 성리학의 거봉으로 인정받고 있었으나, 고봉은 32살의 나이로 이제 막 신진학자로 시작할 때입니다.

 

이럴 때 명성만 쫓는 학자라면 새까맣게 어린 후배가 자신의 학설이 틀렸다며 도전적인 편지를 보내오면 화를 내고 상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퇴계는 달랐습니다. 퇴계는 처음 고봉이 추만 정지운의 천명도(天命圖)에 대한 퇴계의 주장을 반박하는 편지를 보내왔을 때,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자신의 주장을 재검토하고 고봉의 반박을 수용합니다.

 

고봉은 젊은이의 혈기로서 퇴계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퇴계가 답장을 보내오리라고는 확신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고봉은 퇴계가 자신을 대등한 학자로 존중하며 공손하게 편지를 보내오자 감격해합니다. 고봉과 퇴계 사이에 사단칠정에 대해 논쟁이 오갈 때 고봉이 쓴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선생님께서는 이미 높은 덕과 큰 도량을 이루시고도 매일 새롭게 더해 공부하시니, 성정의 실상과 성현의 말씀에 대해 이미 남김없이 꿰뚫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논변하시는 사이에 항상 스스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내가 뛰어나다고 남의 말을 소홀히 하지도 않으며, 내가 넉넉하다고 남의 단점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고서, 겸허한 마음으로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거나 싫어하지 않으십니다.

 

게다가 한 글자의 잘못도 반드시 고쳐서 덮어두지 않으며, 한 글자의 치우침도 반드시 진술하여 숨기지 않으셨으니,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지식도 높이시고 다른 사람도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보잘 것 없는 저도 선생님의 가르침에 빠져들어 마음을 씻고 뜻을 다듬어 학문을 그만두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옛사람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는데 선생님께서 하시었습니다. 제가 이것을 몸소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퇴계가 죽은 해인 1570년까지 13년 동안 편지를 왕래하면서 실제로 만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퇴계가 임금의 부름을 몇 번이나 고사하다가 잠시 한양에 올라와 있을 때, 고봉도 한양에서 벼슬을 할 때 잠시 만난 것이지요. 그 외는 퇴계는 영남의 안동에, 고봉은 호남의 나주에 떨어져 있어 편지만 오갔을 뿐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우편제도가 없던 당시에 편지 왕래도 어디 쉬었겠습니까? 인편을 이용하는 것인데, 당시 인편이라는 것이 지방과 서울은 오고 가는 것이 많았지만, 영남과 호남을 오가는 인편은 적었습니다. 그래서 퇴계와 고봉은 편지를 한양 가는 편에 보냈다가, 거기서 다시 영남이나 호남 가는 편으로 전달이 되게 하기도 하였지요. 이러다보니 몇 통의 편지가 한꺼번에 도착하기도 하고요.

 

이들이 마지막 만난 것은 퇴계가 죽기 1년 전인 1569년입니다. 이 때 퇴계는 임금의 부름을 받고 한양에 올라왔다가 배를 타고 남한강을 거슬러 귀향하는데, 귀향 후 퇴계가 고봉에게 쓴 편지의 일부분을 한 번 보지요.

 

동호(東湖- 동호대교 근처가 호수처럼 잔잔하다 하여 동호라고 부름)의 배 위에서 나누었던 정이 꿈결 속에 되살아나니, 봉은사까지 따라와 묵은 하룻밤의 뜻이 더욱 깊게 느껴집니다. 서로 취해 말없이 바라보며 천리의 이별을 다 이루었습니다. 손수 쓰신 편지와 아울러 시 한 편을 받으니, 마치 다시 얼굴을 대하는 듯하여 참으로 위로되고 다행스러움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여강(驢江 - 여주 근처)을 지나면서부터 사나운 바람과 심한 비로 뱃길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충주에서 육지로 올라, 눈 덮인 길을 걸어 산봉우리를 넘었으나, 오히려 다른 병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고향 땅에 들어서니 봄이 한창 무르익어 마치 항상 서로 대했던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서로 만날 날이 아득하여 기약이 없습니다. 오직 큰일에 더욱 힘쓰고 뜻을 높이고 깊게 하는 데 노력하시어 시대의 바람에 부응해 주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퇴계는 편지에서 앞으로 만날 날이 기약이 없다고 하였는데, 결국 퇴계는 그 이듬 해 일흔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뜹니다. 고봉은 퇴계의 부음을 듣고 신위를 설치하고 통곡합니다. 자신을 알아준 진정한 성리학의 사표(師表)를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없다는 슬픔에 고봉은 통곡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런 고봉도 퇴계가 죽고 2년 뒤인 1572년 퇴계의 뒤를 따릅니다. 병으로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내려가다가, 46살의 나이에 고부에서 객사한 것이지요. 자기를 알아준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그 슬퍼함이 몸까지 해쳐 객사한 것인가요? 퇴계가 인정한 고봉 같은 학자가 46살의 이른 나이에 죽은 것은 조선의 성리학계에서는 참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퇴계는 이렇게 자신의 대유학자로서의 위명만 믿고 거드름을 피지 않고 아무리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의견이라도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학설만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가 틀렸다고 생각하면 서슴없이 견해를 수정했습니다. 이렇기에 중국의 근대 사상가 양계초는 공자를 공부자(孔夫子)라고 부르듯이, 퇴계 이황을 이부자(李夫子)라고 불렀습니다. 그뿐입니까? 일본 근세 유학을 열은 야마자키는 퇴계가 주자의 직제자나 다름없으며, 조선의 으뜸이라고 추앙하였습니다.

 

학문에서만 그렇습니까? 퇴계는 인간적으로도 참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조선 선비들이 쓴 산수유람록을 보면 선비들이 유람하면서 절에서 숙식하고, 이동하면서도 스님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많이 나옵니다. 이럴 때 머리에 얄팍한 유학 지식만 들은 선비들은 스님들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이를 당연히 여기고 스님을 깔보면서 불교와 스님을 비판합니다. 그렇지만 퇴계는 소백산 유람을 할 때에 자신을 도와주는 스님들에게 따뜻한 애정을 내비칩니다.

 

그리고 퇴계는 상처(喪妻)한 뒤 재혼한 부인 권씨가 자신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사사(賜死, 임금이 내린 독약을 스스로 마셔 죽음)됨으로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아내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함에도, 부인 권씨가 죽을 때까지 따뜻하게 감싸줍니다. 한편 퇴계가 단양 군수로 있을 때 기생 두향이와의 사랑 이야기는 또 어떻습니까? 대유학자라면 혹시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갈까봐 기생을 멀리 하거나, 남들이 모르게 은밀하게 사랑을 나눌 텐데, 퇴계는 두향이의 지성미에 반해 나이를 초월한 사랑을 나누지요.

 

물론 당시 퇴계는 아들과 부인 권씨가 세상을 떠서 인간적으로 매우 외로울 때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퇴계는 딱딱한 성리학의 세계 속에서도 남녀간의 사랑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9개월의 짧은 사랑 끝에 이별하였음에도 퇴계는 죽을 때까지 두향이를 잊지 않았지요. 퇴계의 마지막 유언이 두향이가 이별 정표로 준 매화에게 물을 주라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런 퇴계이기에 낮퇴계, 밤토끼라는 야담도 생긴 것이겠지요.

 

그 동안 퇴계와 고봉의 편지를 통한 사단칠정론 논쟁 이야기만 알고 있다가, 이렇게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를 읽으면서 퇴계와 고봉의 생생한 숨결, 인간적 모습, 학문적 우정의 깊이를 새삼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퇴계와 고봉이 그런 생생한 편지를 남기지 않았다면, 어찌 450년 뒤의 후생이 두 대유학자의 인간적 체취를 바로 옆에서 목격한 것처럼 느낄 수 있었겠습니까? 이번에도 책을 통해 시간 속으로의 의미 있는 여행을 할 수 있어서 뿌듯함 속에 펜을 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