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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듣는 이야기

천안아우내 만세운동 이끈 김구응・최정철 모자(母子)

[3.1운동 100돌 100인의 여성독립운동가 ] <5>
최정철, 김구응 의사 증손자 김운식 씨와 대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놈들아! 내 자식이 무슨 죄가 있느냐! 내 나라 독립만세를 부른 것도 죄가 되느냐! 이놈들아! 나도 죽여라!” 이는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 가담하여 현장에서 순국한 최정철(崔貞徹 , 1853.6.26. ~ 1919.4.1.) 애국지사 무덤 묘비석에 적혀 있는 글이다.

 

무덤을 찾아 간 지난 1128()은 몹시 추운 날씨로 금방 눈이라도 쏟아질 듯 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길찾개(네비게이션)로 찍은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가전리 산 8-6 지점은 생각 보다 넓어 무덤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간신히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찾은 최정철 지사의 무덤 앞에 서니 왠지 가슴이 먹먹했다.

 

무덤 앞자락에는 아드님 김구응 의사(義士, 1887.7.27.~1919.4.1.)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고, 바로 위쪽에 최정철 지사가 잠들어 있었다. 어머니와 아들이 일제의 총칼에 찔려 같은 날 비명에 순국하여 제삿날이 같은 이런 비극의 역사가 어디에 또 있겠는가!

 

천안군 병천시장에서 의사(義士) 김구응이 남녀 6400명을 소집하여 독립선언을 할 때 일본헌병(일경)이 조선인의 기수(旗手, 행사 때 대열의 앞에 서서 기를 드는 일을 맡은 사람, 곧 조선인들)를 해치고자했다. 조선인들은 맨손으로 이를 막느라 피가 낭자했다. 그러자 일본헌병은 이들의 복부를 칼로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라 김구응이 일본헌병의 잔인무도함을 꾸짖자 돌연 총구를 김구응에게 돌려 그 자리에서 즉사케 했다. 김구응은 머리를 맞아 순국했으나 일본헌병은 사지(四肢)를 칼로 난도질했다. 이때 김구응의 노모(최정철 지사)가 일본헌병을 향해 크게 질책하자 노모마저 찔러 죽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 (김병조 지음, 1920.6.), 이 책은 국한문혼용이지만 이해가 어려워 필자가 이해하기 쉽게 번역함, 76-

 

 

천인공노할 일이란 바로 이런 일을 두고 말함일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와 아들은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 시위날인 191941일 함께 순국의 길을 걸었다. 김구응 의사 32살이요, 최정철 지사 67살이었다.

 

겨울 찬바람 한 자락이 휙 하고 지나간 모자(母子)의 무덤은 적막감만 일었다. 어머니와 아들의 무덤 앞 돌비석에는 191941일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 시위 상황이 깨알같이 빼곡히 적혀있었지만 그 누가 있어 이들 모자가 천안 아우내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임을 알랴! 무심한 건 세월뿐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들 모자의 장렬한 순국을 기록해둔 분이 있었다. 바로 『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을 지은 김병조(金秉祚,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선생이다. 김병조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의 한분으로 상해에서 임시정부에 관여하면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06『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을 지었다.

 

이 책은 최정철 지사와 김구응 의사의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다룬 최초의 책이자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바로 이듬해에 나온 책으로 이 책을 통해 아우내 만세운동 당시의 정확한 실상을 알 수 있다.


이 책과 같은 해에 나온 책으로는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 상해, 572)도 있는데 이 책도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는 천안 아우내장터의 주모자를 김구응(主謀者 金九應) 의사로 기록하고 있다. 그간 우리는 천안 아우내장터의 만세운동 주모자를 유관순 열사로 알고 있지만 이 두 책의 천안 병천(아우내)독립운동편에 유관순 열사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증조할머님(최정철 지사)은 안동김씨 집안으로 시집오셔서 현모양처로 한 집안의 살림을 잘 꾸려가셨습니다. 효부로 소문난 증조할머님은 3·1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 증조할아버님을 여의고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191941일 아우내 지역 만세운동의 주모자인 아드님 김구응 의사가 왜경에 총살당하는 것을 지켜보셔야했습니다. 그리고 증조할머님 자신도 만세현장에서 아드님과 함께 총검에 무참히 살해당하셨지요. 왜경은 증조할머니(최정철 지사)와 할아버지(김구응 의사)를 총으로 쏘고 총검으로 난자하는 참극을 저질렀습니다.”

 

최정철 지사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 1126()에 만난 증손자 김운식 (69) 씨는 그렇게 증조할머님의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으로부터 98년 전 이야기이니 만치 증손자 역시 기록과 구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기자 앞에 내놓은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기록들을 살펴보면서 증손자가 타준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기 무섭게 기자는 말했다.

 

천안 아우내장터의 주모자가 할아버지 김구응 의사(義士)라는 이야기는 미처 몰랐습니다. 저는 유관순 열사가 주모자인줄 알았거든요.”

 

기자의 말에 증손자 김운식 씨는 답했다.

 

“3·1 만세운동 때 유관순 열사는 16살이었습니다. 한학과 신학문을 겸비한 김구응 할아버지는 그때 32살이셨고 당시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진명학교 교사였지요. 이 보다 앞서 할아버지는 병천면 가전리에 청신의숙(淸新義塾)이란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후 감리교에서 운영하는 근대식학교인 장명학교(長命學校)를 거쳐 진명학교에 재직 중이셨지요.” 증손자인 김운식 씨는 그렇게 말하며 잠시 말끝을 흐렸다.

 

 


할아버지는 진명학교 교사 생활을 하면서 많은 제자와 지역 유지들과 친분 관계를 맺고 계셨습니다. 그러한 폭 넓은 인맥관계 형성이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계획하는 데 큰 밑거름 역할을 하셨던 것입니다.” 증손자는 말을 이어갔다.


사실 일제 강점기에 민중 못지 않게 억압과 탄압을 받은 것은 종교였다.  진명여학교를 만들어 민족교육을 실시하던 성공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모든 선교사들이 추방을 당하고, 교회에서 운영하던 사립학교가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충남 아우내(병천)에서 있었던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 성공회가 깊이 관여하면서, 일제에 의한 탄압은 가중되었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은 성공회병천교회가 운영하던 진명학교의 교사 김구응의 지휘 아래 교인들과 지역유지, 젊은 청년, 학생들이 아우내장터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증손자 김운식 씨는 기자에게 논문 <성공회 병천교회의 3·1 아우내 만세운동에 대한 기여> (전해주. 2006. 성공회대학 석사논문) 한편을 건네주었다.

 

이 논문에는 천안 아우내 장터의 만세운동 주모자가 김구응이었다는 것을 소상히 밝혀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관순 열사가 한국의 잔다르크, 독립의 여전사로 부각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전해주, 논문 35~36)

 

김구응 지사가 순국하고 난 뒤 광복을 맞이하기 전까지 26년간 마을에서는 만세운동을 기념한다거나 희생자 추모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렇게 천안 아우내 독립운동도 모든 이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해방 후, 이 지역출신이면서 아우내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하나인 조인원의 아들이기도 한 독립운동가 조병옥 박사(1894 ~ 1960)가 대한민국정부수립에 입각함으로써 이 지역 만세운동이 새로운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조 박사는 대한민국정부수립(1948)과 함께 경무장관, 대통령특사, 유엔 한국대표 등을 겸직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과 민족적 구심점을 찾기에 고심한다.

 

그는 같은 동네의 유관순을 생각해내고 그녀를 한국의 잔다크로 여전사로 부각시킨다. 또한 조 박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도 자신의 부친 조인원이 아우내 만세운동에서의 주동자중 한사람이며 현장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것을 알리는 등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것도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관순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제작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이 영화는 볼거리가 없던 당시 공전의 히트를 쳤으며 그 후 1962년에도 역시 이를 소재로 한 같은 영화가 제작되어 교육목적으로 대한민국 학생이라면 모두 단체관람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후 유관순 열사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고(실제 주동자인 김구웅 의사는 1977년이 되어서야 대통령 표창(1991년 애국장)) 그 후 계속해서 병천에 그녀를 기념하기 위한 각종 사업들이 줄을 이었으며 그 결과 유관순 기념교회 건립(1967), 추모각과 봉화탑 건립(1972), 유관순 열사 동상 건립(1983), 유관순 생가 복원(1991), 유관순 기념관 건립(2003) 등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논문을 쓴 전해주 씨나 최정철 지사의 증손자인 김운식 씨는 이러한 사항을 두고 오해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바로 유관순 열사의 고귀한 독립운동 이야기가 폄훼(貶毁, 남을 깎아 내려 헐뜯음)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나 역시도 그 점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바이다. 유관순 열사야 말로 만세 현장에서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한 7명의 친인척을 잃은 당사자이며 본인도 만세운동을 부르다가 옥중 순국을 한 몸이 아니던가!


 

논문을 쓴 전해주 씨는 유관순 열사는 감옥에 잡혀 방대한 재판 기록이 있지만 김구응 의사는 당일 현장에서 바로 순국하는 바람에 재판 같은 기록이 없을 뿐 아니라 순국 뒤에 일제로부터 해방되기 전까지 남은 가족들이 입을 피해를 생각하여 그 어떤 기록 같은 것을 남기지 않은 것이 김구응 의사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이유로 보았다.

 

최정철 지사의 증손자인 김운식 씨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그가 왜 이 논문을 내 손에 들려주었는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특히 3·1만세 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의 역사책으로 1920년에 나온 김병조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과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나오는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기사 속에 주모자 김구응부분은 몇 줄 안 되지만 의미심장한 내용이었다.


 

역사의 소중한 순간을 기억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한 일이다. 더군다나 나라를 잃고 혈혈단신으로 고군분투한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한다. 98년 전,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주모자로 현장에서 일제의 총칼을 맞고 순국한 김구응 의사, 그리고 그런 참극을 지켜보며 일제를 향해 나라를 되찾겠다고 만세 운동을 한게 무슨 죄냐?”고 호통을 치며 숨져간 최정철 지사 모자(母子)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생생한 실화요,, 독립운동사에 영원히 기록될 장렬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천안 아우내장터의 만세운동을 한 주모자의 무덤은 안내용 팻말도 없이 쓸쓸했다. 나는 무덤 가에서 3년 전 광복 70주년(2015)을 맞아 국회에서 있었던 대토론회를 떠올렸다.

 

그때  나는 여성독립운동가를 어떻게 알릴 것인가?”라는 주제로 토론회에 참석했는데, 이러한 주제를 설정한 까닭은 유관순 열사 외에 우리 국민이 알고 있는 여성독립운동가가 너무나 빈약한 실정을 평소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론회에서 나는 유관순(1902~1920,18) 열사 보다 1살 어린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 동풍신(1904~1921,17) 열사를 비교 조사하여 발표했었다. 그 자료를 토대로 보면 유관순 열사에 관한 단행본은 17, 논문은 150여 편, 영화, 다큐 등 EBS 5부작 프로그램 외 다수, 기념관 182,169(55,000여 평)에 추모관, 기념관, 체육관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음을 밝힌 적이 있다. -광복·분단 70주년 기념 대토론회, <통일의 길 한국여성, 독립운동에서 찾다>, 여성독립운동가를 어떻게 알릴 것인가?”이윤옥, 2015.2.25.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 자료집 80쪽 참조-

 

새삼 김구응 의사와 최정철 지사 이야기를 하면서 유관순 열사 이야기를 꺼낸 것은 유관순 열사도 훌륭한 의인(義人)이지만 이 모자(母子)야 말로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의 주역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는 증조할머니(최정철)와 할아버지(김구응)가 독립투쟁에서 보인 용기있는 행동에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명여학교 교사 등을 하면서 지역 유지로서 아우내장터 만세 운동을 이끌다가 한날 한시에 순국의 길을 걸은 두 분의 삶을 기억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무덤을  내려오면서 나는 증손자 김운식 씨가 한 말을 떠 올렸다. 비록  찾는 이가 없는 쓸쓸한 무덤이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값있는 죽음을 맞이한 모자(母子)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헌신으로 조국이 광복을 맞이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