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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의 숨은 조력자 '조지 애쉬모어 피치' <4>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미협회의 중국 국민당 정부 접촉을 통한 임정승인 외교 시도도 여의치 않게 흘러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한미협회 후견인으로 활동하던 제랄딘이 나서게 되었다. 제랄딘은 한미협회의 다른 인사들과 달리 이승만 이외에도 김용중 등 미주 한인사회의 다양한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미국 내 주요인사들과 접촉했다.

 

게다가 애쉬모어와 제랄딘은 장제스, 장췬, 궈다이치, 쑹메이링 등 중국 국민당 정부 관계자들과 이미 1920년대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결국 한미협회 인사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교섭이 어려워지자 제랄딘의 협조를 받기로 했다.

 

쑹메이링과의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제랄딘은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정 승인을 재촉했다.

    난 당신(쑹메이링)이 내 남편(애쉬모어)과 그의 아버지(필드)가 한국 사람들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승만과 김구처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망명자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수십 년 동안 쉬지 않고 헌신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중략 지금 총통(장제스)이 이끄는 중국 사람들이 중경에서 한국 임시정부에 기꺼이 피난처를 제공한 데에 대해서 우리의 국무부(미 국무부)는 이승만의 활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국무부는 극동에서 중국의 리더십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서방 국가들도 점차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중략 나는 워싱턴에서 제안된 한미협회 회의에 참석할 것입니다. 또한 루즈벨트 대통령 부인과의 회동 약속을 확보해서 한국 독립의 문제를 언급하여 그녀가 임정과 한국 독립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할 것입니다.


제랄딘은 쑹메이링에게 중국 국민당 정부가 충칭(重慶)으로 피난한 임정 인사들을 지원한 것에 대한 감사를 표명했다. 또한 이러한 활동이 미 국무부가 극동에서의 중국의 역할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가 지원을 계속한다면 서방국가들도 이에 동참할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의 영부인과의 회동을 통해 한국 문제를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언급하고자 노력했다. 동안 미주 한인사회와 한미협회 등 민간 부분에서 한국 독립 문제를 계속 언급하고 있었지만, 미국 정부의 반응은 적극적이지 못했다. 이처럼 제랄딘은 임정승인 외교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본인이 가진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활동에 나섰다.

 

제랄딘이 쑹메이링에게 서한을 보내고 난 뒤 곧 중국 국민당정부는 사실상 임정을 인정하는 분위기라는 답장을 받았다. 또한 동시에 한미협회 회장 크롬웰도 미국무부장관 헐에게 임정 승인을 강력히 촉구했고, 스태거스 또한 임정에 대한 미국정부의 차관을 제공하도록 요청했다. 한미협회의 적극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임정 승인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제랄딘은 한미관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다.


  제랄딘이 미국에서 정책결정자들과 접촉하며 미국 정부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거나 미국 사회 전반에 한국 독립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호소하던 시기에 애쉬모어는 중국에 남아서 활동했다. 전쟁의 여파로 1939년 중국 국민당정부가 이동하자 애쉬모어도 함께 충칭, 1944년 란저우(蘭州)로 이동해 YMCA 총간사로 활동했다.



  이동기간 동안 애쉬모어는 버마 랭군과 충칭을 연결하는 버마로드(Burma Road)’를 오가는 미군의 수송작전에 참가했으며, 중국에서 벌어지는 미군 작전에 고문자격으로 참가해 중국어 통역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46월 애쉬모어는 미국무부에 임정의 인적구성과 이들이 종전 이후 한국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 총 12개 항목으로 정리해 보고하기도 했다.

 

애쉬모어의 보고서는 1919년 임정 수립과 이후 모든 활동에 대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 파악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시각까지 담겨있었다. 또한 광복군의 활동에 주목하여 이들을 활용하여 대일전에 나서면 미국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게다가 임정 내부 인사들의 정치적 성향까지 파악하여 보고했는데, 이러한 애쉬모어의 보고는 광복군 제2지대와의 OSS 합동작전과 미국의 전후 대한정책 수립과정 및 그 내용과 맥락을 같이했다.

 

19458월 전쟁이 끝나자 애쉬모어는 30여년 간의 YMCA활동에서 은퇴를 했으나, 곧이어 전후 복구를 위해 조직된 연합국구제부흥기관(UNRRA)의 중국담당관으로 활동했다. 이후 애쉬모어는 다시 한 번 은퇴를 하고자 했으나 19477월 한국 YMCA 총간사로 임명되어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194777일 한국에 내방한 애쉬모어 부부는 대한민국정부수립에 앞서 대한적십자사의 정식 발족 준비와 한국 YMCA조직에 나섰다. 애쉬모어 부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국 각지에 YMCA조직과 함께 상하이에서 해왔던 것처럼 구호에도 앞장서다가 194988일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애쉬모어, 제랄딘은 한국과의 관계를 지속하며 구호 및 원조활동에 종사했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애쉬모어는 195218일 대한민국정부로부터 문화공로훈장을 수여받았고, 196831일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애쉬모어와 제랄딘은 1963년 모든 활동에서 은퇴하여 타이완을 떠나 캘리포니아주 클레몬트(Claremont)로 돌아갔다.

 

은퇴 이후 클레몬트 자택에서 여생을 보내다 제랄딘은 19769월에 84세로, 애쉬모어는 197912096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운명했다. 이들은 뉴욕 주 에섹스 카운티(Essex County)에 있는 밸리 뷰 묘역(Valley View Cemetery)에 합장되었다.

 

피치 일가는 1900년대부터 한국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정부수립 및 6.25전쟁을 거치는 긴 시간을 함께 했다.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 외국인들 중에서 피치 일가는 2대에 걸쳐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점에서 수많은 외국인 지원자들 중에서 하나의 독특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피치 일가는 가족이 전부 기독교 선교사로 중국에서 활동하며 동아시아 지역에서 선교, 서구적 교육, 구호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제국주의의 폭압적인 성격을 파악하게 함으로써 제국주의 타도에 앞장섰다.

 

또한 피치 일가는 일제강점기의 활동에만 그치지 않고 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한국과 타이완(臺灣)에서 활동했다. 해방 직후인 1947년 한국 YMCA 총간사로 한국에 온 애쉬모어와 제랄딘은 한국의 YMCA 조직과 함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제랄딘은 1947년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중앙대학교로 개편하는 과정에 도움을 주며 명예학위를 받기도 했다.

 

피치 일가의 활동에서 보이듯이 대한독립운동은 민족주의 성향이 다분한 한국인들만의 투쟁은 아니었다. 대한독립운동에는 피치 일가를 비롯해 많은 외국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이유는 한국독립운동이 지니는 가치 때문이었다. 대한독립운동은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이 힘을 모아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며 세계인의 보편적 가치인 인류애와 자유라는 기치를 되찾고자 한 자유운동이었기 때문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