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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화주당(化主堂)의 역사와 유래 (1)

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14 - 서울의 신당(神堂) 1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2017년에 자취를 감춘 화주당(化主堂)은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96-9번지 대지 약 150여 평 위에 있었던 서울의 신당이었다. 원래 위치는 그 보다는 더 위쪽에 있었고 그곳은 19631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기 전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서울 아시안게임 2년 전인 1984년 지역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옮겨졌던 것이다.

 

이전되어 빌딩 숲에 같히기 전인 80년대 까지의 화주당은 멀리 대모산(大母山, 291m)이 눈에 들어 왔을 정도로 주위 환경이 자연과 어우러져 있었지만 서울의 강남 개발로 차츰 환경이 변화되기 시작하였고 당 역할 또한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수난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20177월에 이르러서는 그 흔적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화주당에 봉안되었던 주신(主神)은 이회 장군이다. 이를 한편에서는 대감이라 칭했지만 화주당을 마지막으로 지켰던 당지기 조영환, 문정자 부부는 끝까지 장군으로 모셨다. 전래 담에 따르면, 이회 장군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었으나 훗날 그의 충렬정신이 밝혀져 민중들에 의해 충렬신(忠烈神)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를 모신 신당 또한 충렬화주당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화주당이 헐리기 전까지 당집에 남아 있었던 현판에도 한자 표기 忠烈化主堂이라 쓰여 있어 그 내력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또 달리, 이회 장군(또는 이회 대감)을 매대왕신(鷹大王神) 또는 매당왕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가 죽음을 당할 때 매()가 날아 와 신비스러운 행적을 보여준 것이 유래가 되어 사후 대왕신(大王神)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그래서 서울굿 신가(神歌)에서는 물 건너 하주당 내달왕신[鷹大王神] 산할[산활]호구라 하고 이회장군과 호구신이 된 그의 처를 청하기도 한다. 이회장군 둘째부인은 임신 중에 죽어 산활호구가 되었다고 전하기 때문에 이회장군과 더불어 그의 처도 화주당 신으로 봉안된 것이다.

 

이회 장군(이회 대감 또는 매대왕신 혹은 매대왕신)을 모신 당을 물 건너 화주당이라 한다. 이는 서울 행정구역이 강북에 한정되어 있을 당시, 서울지역 만신들이 거주하였던 지역을 기점으로 하여 한강 물 건너편에 있었던 화주당을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화주당이 언제부터인가 영혼결혼식을 전문으로 맡아 하던 당으로 구실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죽은 영혼이 저승으로 가기 위해선 물을 건너야 하고 한번 건너간 영혼은 다시는 물을 건너 올 수 없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강북 만신들은 물 건너편에 있는 화주당을 죽은 영혼을 다룰 수 있는 당으로 삼았을 것이다.

 

화주당이 망자혼례식을 거행하는 당으로 변화된 것은 이와같은 지리적 특성이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화주당은 한 때 죽은 처녀총각 영혼결혼식을 도맡아 하던 당으로써 역할하였다. 그리고 서울 만신들이 화주당을 가기 위해선 뚝섬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야 했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뚝섬 화주당이라는 말도 생겨난 것이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1984년까지의 화주당은 한강변 언덕 높은 곳에 위치해있으면서 가깝게는 한강을 바라보고 멀게는 남한산성을 향하고 있었다. 당시의 당 구조는 목조 건물 당집과 살림채가 각각 독립적으로 있었고 앞마당에 당을 지키는 당나무가 있었다. 당집 뒤편의 언덕 맨 꼭대기에 산신을 모신 산신터가 있었고 앞쪽으로 널따랗다 펼쳐진 한강이 용왕당으로 구실 했었다.

 

지형이 높았지만 당집 앞으로 널따란 공간이 있어서 마당에서도 의례가 베풀어 졌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오가는 도로와는 떨어져 있었던 터라 아무나 쉽게 접근할 수는 없는 성스러운 지역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면서 당 주변이 나무와 숲으로 우거져 자연과도 잘 어우러 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당 주변에 소피를 본다던지 또는 나무를 꺾는다던지 하면 해를 입을 수 있다고 여겨 행동을 조심하고 하였다.

 

화주당 건립과 관련된 구전자료에 따르면, 당 터는 과거 이회장군이 쉬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행당동 애기씨당굿 보유자 김옥렴(1936년생) 만신이나 화주당 당주 집안의 자손 중 유일하게 신내림을 받은 후 왕십리에서 무업을 하였던 조임신(1932-2007, 일명 연술 할머니) 만신 및 서울 구대만신들이 증언하는 화주당 건립 위치와 그 연유에 대한 전래 담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은 화주당이 들어선 곳은 이회장군이 멀리 남한산성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했던 터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이회장군 영험력이 서려 있다고 믿고 훗날 민중들이 장군을 모신 당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장군이 모셔진 당에서 의례를 베풀면 큰 덕을 보곤 하였다고 한다. 사실 화주당은 한강(漢江)을 아래쪽에 두고 있으면서 멀리는 남한산성이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한편, 이러한 전래담과는 달리 화주당 건립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은 한강의 지리적 여건과 관련된다. 화주당 아래쪽으로 펼쳐진 한강은 늘 뱃사람들이 불안하게 여겼을 것으로 여겨지는 암초와 여울이 곳곳에 있었다. 그래서 뱃사람들은 이곳을 왕래할 때면 늘 불안한 마음을 갖고서 노심초사속하며 지나곤 하였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이 곳의 언덕 위에 당을 지어 시시때때로 뱃사람들의 안전운항을 빌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19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화주당에서는 년 초 그리고 가을이 되면 당굿을 열었다. 장군님 생신 때도 메를 올려 의례를 베풀었다. 칠월에는 칠석맞이를 하는 등 매달 주요한 세시 일에 늘 연례행사가 있었다. 2017년 당이 헐리기 전에도 장군님 생신이었던 824(), 음력 7월 초사흘을 맞아 정성껏 메를 올린 것을 보더라도 옛 전통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햇곡식이 나는 가을 당굿은 음력 시월상달을 맞아 초사흘에 열렸는데 많은 지역민들은 물론이고 멀리 거주하는 화주당 신도들도 대거 참여하였다. 1980년 마지막으로 화주당 당굿을 주관하였던 조임신 만신과 김옥렴 만신에 의하면 이회 장군과 원당 부군으로 봉안한 대신할아버지와 대신할머니를 모시고 유명한 삼잽이 악사 및 수많은 큰만신들을 초청하여 거대한 당굿을 치렀다고 한다.

 

그렇게 이어져 온 당굿을 비롯한 연례행사는 서울 아시안게임 두 해전인 1984년 화주당 일대가 본격적인 주택지로 개발이 되자 그 맥이 사라지게 되었다. 당은 본래 위치에서 약 20여 미터 아래쪽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의례 전통 또한 끊기고 만 것이다.

 

150여평 대지 위에 세멘트 콘크리트로 지어진 현대식 당으로 바뀌고 부터는 유형적 당의 형태는 물론이고 무형적 의례 또한 변모되거나 없어지고 만 것이다. 새롭게 지어진 화주당에 과거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담아 내기 위해 옛 당집 기와를 가져다가 콘크리트 지붕에 올리기도 하였지만 옛 모습을 살려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주하여 새롭게 지어진 콘크리트식 화주당의 건물 앞 쪽은 이층으로 된 살림집이었다. 뒤 쪽으로 붙어 있었던 부분이 당집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겉에서 보면 한 개의 건축물로 되어 있었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두 개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층으로 된 살림집은 아래층의 거실, 안방, 세면대와 화장실, 그리고 부엌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이층은 복도를 중간에 두고 방 세 개가 붙어 있었다.

 

이와는 달리 당집은 의례를 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는데 그 규모는 비교적 작았다. 당집 중앙은 신령님들을 모신 신당으로 꾸며졌었고 벽면 아래쪽으로 신단을 설치하였다. 당집 천청 위에는 용 그림으로 장식한 대들보가 있었다. 그리고 신당 좌우로 각각의 방이 딸려 있었다. 이곳에서 잠을 자거나 의례용품을 보관하기도 하였고 망자혼례굿을 할 때는 신방으로써 구실하기도 하였다. 당집과 살림집 사이에 조그마한 터진 공간이 있었고 담 벽으로 화장실이었다. 그리고 터진 공간에서 정문 쪽으로 통하는 계단이 나 있었다.

 

강남도심 개발은 화주당을 보다 밀접한 주택가 속에 파묻히게 만들었다. 빽빽하게 들어선 주택들로 인해 2000년대부터는 징 장고 소리를 내는 의례를 할 수가 없었다. 민원을 무릎쓰고 어쩔 수 없이 의례를 해야 할 경우에는 당집 안쪽과 바깥쪽에 딸린 모든 문을 굳게 닫고 아주 작은 소리를 내는 정도였다. 그래서 당에서는 징장고소리가 나지 않는 간단한 소규모 치성 같은 의례만이 간간히 허락하였다.

 

화주당을 찾는 단골들이 몇몇 있어 새해가 되거나 특별한 일이 있으면 신령님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오곤 하지만 그것은 블 밝히어 잔 올린 후 절하는 정도로만 이루어졌었다. 성동구에 사는 황광희 여사(1952년생)의 집안은 대대로 이곳 화주당에 임씨할머니(1989년에 발간된 김태곤 한국무신도에는 불사할머니로 기록됨) 영정을 모셔두고 때가 되고 시가 되면 정성껏 문안 인사를 드리곤 하였지만 그 역시도 간단한 무언의 기도 정도만이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