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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조선조 왕실의 효행을 실천한 화성 용주사(龍珠寺)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화성 용주사(龍珠寺)는 신라 854년인 문성왕 16년에 세운 절로 처음에는 갈양사(葛陽寺)였다고 한다. 그러나 952년 고려 광종 3년 병란으로 소실되어 옛 영화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 절이 오늘의 용주사가 된데는 조선 제 22대왕인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장현세자)의 능을 이곳에 옮긴 뒤, 1790년 갈양사 자리에 장현세자의 융릉을 돌볼 능사(陵寺)로서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 명복을 빌면서부터 다시금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정조는 이 절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서 시주금을 모금하여 팔만칠천냥의 돈을 모았고, 이로부터 4년에 걸친 공사 끝에 절을 완성하였는데,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게 된 연유로 절의 이름을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용주사가 중건되고 용주사는 팔도의 모든 사찰을 통제하는 총본부가 되었다.


 유교를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이렇게 용주사를 중건한 이유는 살아서 효를 다하지 못한 사람들이 고인을 위해 죽은 뒤에라도 명복을 빌고 싶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조는 용주사 건립을 통해 죽은 아버지가  아미타극락정토에 태어나길 간절히 바랐을 것이이다


용주사는 그 중창주인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인 장현세자(사도세자)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하여 세운 절이기에 다른 어느 절보다도 효행에 대한 깊은 신심과 염원을 강조하였다. 그래서인지 경내에는 근래에 부모은중경탑을 세우고 효도를 일깨우기 위하여 부모은중경을 새겼으며, 부모에 불효하면 어찌되는지에 대한 경계의 글도 함께 새겼다.


이런 용주사에는 정조시대 도화서 화원이었던 단원 김홍도가 그린 불화가 있는데, 그가 그린 대웅전 후불탱화는 다른 절의 불화와는 사뭇 달리, 입체감이 느껴지게 그려져 있다.  용주사에는 근세 일제강점기 한국불교의 법맥을 지켜낸 전강대종사의 사리탑과 비가 있는데, 전강대종사는 격동의 조선말인 1898년 태어나 불교에 출가하여, 당시 대선지식인이었던 해월 해봉 한암 용성 보월 만공선사에게 모두 인가를 받고, 25살에는 만공선사로부터 그 법을 이었다.


 그는 나이 33살의 젊은 나이에 통도사의 조실로 추대되어 전국의 훌륭한 수행처에는 선원을 개설하여 수행자들의 수행처를 가꾸었으며, 1969년 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용주사가 선풍을 날리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전강대종사는 1974년 12월 2일 인천 용화 선원에서 좌탈입망(앉은자세로 숨을 거두고 입멸)하여 수행자로서의 철저한 삶을 마감하였다. 그런 연유로 전강대종사의 사리탑이 이곳 용주사에 세워지게 되었으며, 그의 선맥을 이어 현재 인천용화선원에는 송담스님이 제자들에게 선맥을 이어주고 있다.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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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