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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이회 장군 영혼을 모신 청량당과 화주당 (2)

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15 - 서울의 신당(神堂) 2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仁祖, 1623-1649) 즉위 2년인 1624년에 경기도 광주 유수(留守) 이서(李曙)가 남한산성(南漢山城) 축성공사를 하게 되었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한양 방어를 위해 쌓은 산성으로써 주봉인 청량산(해발 497.9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그리고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은 곳이다.

 

성벽 바깥쪽은 경사가 급하지만, 안쪽은 완만하여 적의 접근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방어 또한 유리하게 하였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이 함께 연결돼 견고한 방어망이 구축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남한산성에서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고 있어 그 역사는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과거의 남한한성은 성벽과 성안에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동, , 남문루와 장대(將臺), 돈대(墩臺), (), (), 암문, 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의 정도가 남아 있다.

 

어찌 되었건, 남한산성 축성공사를 지휘한 이서는 동남쪽 부분을 이회(李晦)에게 맡기고 북쪽 부분은 중() 벽암(碧巖) 김각성(金覺性, 1575-1660)에 맡겼다. 이회는 낮이나 밤이나 침식을 잊다시피 하면서 돌 하나 흙 한 줌까지 정성 들이며 공사에 몰두하였다. 축성자금이 부족하여 사재까지 털어가며 정성을 들였지만, 자금이 부족하여 공사는 늦어만 가고 있었다.

 

반면, 벽암의 공사는 일이 잘 진행되어 날짜 안에 준공하였고 공사비까지 남겨 관가에 반납하였다. 이때, 이회는 사리사욕을 탐하여 주색잡기에 빠져 공사를 게을리 한다는 벽암의 모함으로 군령에 따라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다

 

이회가 참형을 당하기 전 말하기를 자신이 죽는 순간 한 마리의 매가 날아올 것인데, 만약 매가 날아오지 않으면 자신의 죄는 마땅하지만, 매가 날아오면 무죄인 줄 알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회가 처형되는 순간 그가 말한 대로 한 마리 매가 날아와 근처의 바위에 앉아서 무서운 눈초리로 군중을 홀려보다 자취를 감추었다. 군중들이 매가 앉아있던 바위에 가 보니 매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후, 관가에서 조사해보니 벽암이 쌓은 성은 한 곳도 정성 들인 곳이 없이 허술하였으나 이회가 쌓은 성은 금성철벽같이 견고하였다. 이회가 쌓은 성벽이 다른 성벽보다 튼튼하고 완벽할 뿐만 아니라 무죄 또한 밝혀지면서 그의 충렬(忠烈) 정신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관가에서 서장대 근처에 청량당을 세워 이회 영혼을 위로하고 매가 날아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회의 넋을 달래기 위해 사당을 지어 청량당(淸凉堂)이라 하였다.


오늘날의 남한산성 청량당 내부에는 이회(李晦)와 그의 처첩 그리고 서북성을 쌓았던 벽암스님 김각성(金覺性) 혼령을 모셔놓고 있다. 벽암대사가 함께 모셔진 까닭은 그가 이회와 함께 남한산성을 축조하였고,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승군을 이끌고 용전분투하였는데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여 성하의 맹세를 하는 것을 보고 표연히 자취를 감추자 이를 애석하게 여기고 그 영정을 청량당에 봉안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회 부인 송씨는 남편이 축성비가 부족해 고심하는 것을 보고 기부금을 받아 축성비에 보태겠다며 집을 나간 지 여러 달 만에 기부금을 얻어 배에 싣고 세밭나루(三田渡)에 다다랐다. 이때 남편이 참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통하여 싣고 온 쌀을 모두 강물에 던져버리고 자신도 한강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때부터 이곳을 쌀섬여울(米石灘)이라 불렀는데 안개가 낀 날이나 어두컴컴해질 무렵이면 이곳에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이 나타나 곡성을 내곤 하였다. 사공들이 배를 몰다 곡성 소리를 듣고 삼성동 앞 무동도에 부딪혀 파선하여 익사하곤 하였다. 이후, 사람들은 송씨 부인의 원혼 때문이라 하고 쌀섬여울에서 100m 떨어진 동쪽 강변에 당을 세우고 이회장군과 송씨부인을 모시고 제를 올리게 되었다. 이때부터 배가 파선되는 일이 없고 평온하였다.

 

이와 같은 청량당과 화주당에 관한 이야기가 1958년 최상수(崔常壽)가 펴낸 한국민간전설집(韓國民間傳說集)그리고 1938년 적송지성(赤松智城)추엽(秋葉) ()이 공동으로 펴낸 조선무속(朝鮮巫俗)의 연구 ()에 수록된 무속의 신통(神統)과 성소(聖所)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최상수의 전설집에는 이회가 이인고(李寅皐)로 나오고 있다.


    

 

먼저 최상수가 단기 426710월 광주군(廣州郡) 중부면 산성리 장(, 이름은 모름) 씨의 구술담을 토대로 1958한국민간전설집에 실은 내용이다.

 

지금으로부터 3백 수십 년 전 이조(李朝) 인조왕(仁祖王) 때 경기도(京畿道) 광주(廣州) 유수(留守) 이서(李曙)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축성(築城) 공사를 둘로 나누어 남쪽은 부하의 이인고(李寅皐)에게 북쪽은 중() 벽암(碧岩)에게 각각 분담시키었다. 이인고는 그 날부터 낮과 밤, 일심단성으로 오로지 축성에만 노력하여 돌 하나 흙 한줌에도 정성을 들여 침식을 잊다 싶이 몰두하였었다.

 

그러는 중에 축성 자금이 부족하였으므로 마침내 자기의 사재(私財)까지 전부 던지었다. 그러하였지만 공사를 중공하기에는 아직도 자금은 부족하고 해서 공사는 하루 이틀 늦어만 가고 있었다. 그 반면 벽암의 공사는 착착 진행이 되어서 기일 안에 준공하였을 뿐만아니라 관가(官家)에서 받은 공사비 중에서 남은 금액까지도 관가에 반납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정직한 이인고는 점점 의심을 받게 되어 이인고는 사리사욕을 탐하고 주색(酒色)에 빠져서 공사를 게을리 한다.”는 벽암의 터무니없이 헐어 말함에 의하여 관가에서는 이것을 믿게 되어 불운하게도 그는 서장대(西將臺)에서 참수형(斬首刑)을 받게 되었다.

 

형을 집행하기 전에 그는 조금도 슬픈 기색이 없이 신이 죽기는 합니다마는 신이 죽은 뒤에는 그 진부를 알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으나 윗자리에 앉은 이는 이것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곧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었다. 그러자 뻔적이는 칼날에 비참하게도 이인고의 목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피 흐르는 목에서 한 마리 매가 날아 나와서 이인고의 시체를 돌고 장대 근처의 바위 위에 앉아 무서운 눈초리로 군중을 흘겨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것을 본 군중은 이상하게 그 매가 앉아 있던 바위로 쫒아가 보니 매는 없고 다만 발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이리하여 그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뒤에 관가에서는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이 실지 조사를 해 본 결과 벽암이 쌓은 성은 한곳도 정성들인 곳이 없이 허술하였으나 이인고의 분담하여 쌓은 성은 금성철벽같이 견고 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나중에야 안 관가에서는 많은 돈을 하사하여 서장대 근처에다 사당을 세워 청량당(淸凉堂)”이라 하고 그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그런데 이인고 부인 송()씨도 역시 남편에 못지않는 충렬한 부인이었다.

 

남편이 축성비 부족으로 낮과 밤 고심하는 것을 보고 하루는 그가 남편에게 멀리 여러 고을을 돌아 다녀서 기부금을 받아 그 축성비로 대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표연히 집을 나선지 여러 달 만에 많은 액수의 기부금을 얻어서 이것을 배에 싣고 세밭나루(三川渡)에 다다랐을 때 뜻밖에도 남편이 죽었다는 슬픈 부고를 접하자 통분한 나머지 한강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 관가에서는 그 부인의 충의를 또한 가상하고 그 강가 언덕 위에 사당을 세워 그 영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한편, 적송지성(赤松智城)추엽(秋葉) ()조선무속의 연구 ()에 수록된 무속의 신통(神統)과 성소(聖所)에 화주당(化主堂) 건립과 관련된 매당왕신(鷹堂王神)”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에 공사의 지휘 감독을 맡았던 홍 대감이 평소 청렴결백했음에도 공사비용을 횡령했다는 간인(奸人)의 중상모략으로 마침내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목을 치는 사람이 그의 목을 자르자 갑자기 한 마리의 매가 날개가 묶인 채 그의 목에서 나와 서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홍 대감의 욕심없고 정직함을 증명하게 되었고 그 매를 그의 영혼으로 믿고서 그를 매당왕신이라 칭하고 사당을 세워 이를 제사지냈다.

 

남한산 위의 화주당(化主堂)이 그것이며, 그의 처 산활부인(山活夫人)도 이 남편의 사형을 애통해하며 뚝섬 교외 한강변의 저자도(楮子島)에서 자살했으므로 그곳에도 충렬화주당(忠烈化主堂)이 세워져 있다. 현재 그것은 원통하게 죽은 사람의 원통한 영혼을 위로하는 동시에 많은 귀신과 인간의 원한을 봉하고 금하는 하나의 무당(巫堂)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