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슨 미국대통령이 제안한 민족자결주의와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백성들에게 퍼지자 민족대표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추진된다. 선생은 만세운동 추진을 위해 학생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각 중등학교 대표를 뽑아 학생들을 결속시켰으며, 독립선언서 운반과 배포 장소를 학교별로 정하였다. 아울러 학생대표를 중심으로 2차 만세시위를 3월 5일 남대문역(현재 서울역)에서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일 수천 명의 학생과 일반인이 탑골공원에 모였으나, 민족대표들은 유혈충돌을 우려하여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였다. 선생을 비롯한 학생대표는 민족대표가 탑골공원에 오지 않자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을 하고 남대문과 대한문 양쪽으로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하였다. 급보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헌병의 탄압이 있었으나 오후 늦게까지 시위를 계속하였다.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 광장에서 다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선생은 강기덕 등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들고 약 1만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었다. 일제 경찰은 주모자인 선생에게 폭력을 행사하였고 이때 쇄골이 부러져 사는 동안 계속 고생하였다.
2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잡지 <신생활>과 일간지 <시대일보> 창간에 참여 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폐간되는 등 실패하자 낙향한 후 1928년 별세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원벽 선생>
ㅇ훈격 : 독립장 / 서훈년도 : 1962년
ㅇ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 주도
ㅇ1919년 3월 5일 남대문역(현재 서울역)에서 2차 만세운동을 주도
ㅇ체포 후 경성감옥에서 2년간 옥고
<자료: 국각보훈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