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제주시 봉개동에는 <제주4.3항쟁기념관>이 있습니다. 어두침침한 제1관 ‘역사의 동굴’은 4·3항쟁 당시 제주 사람들의 피난처였던 자연동굴들을 보여줍니다. 그 동굴의 끝 지점에 하얀 대리석 비석이 누워 있지요. 그 비석은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비석 곧 백비(白碑)인데 설명문에는 ‘4·3 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름이 없어 일으켜 세우지도 못한 것입니다.
<제주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주4·3특별법)>에는 ‘제주4·3사건’의 정의를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규정합니다.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희생자 수를 2만5천~3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제주4·3위원회가 집계한 것에는 전체 희생자 가운데 10살 이하가 5.4%(772명), 11~20살은 17.3%(2464명)로, 전체의 22.7%가 20살 이하이며, 61살 이상은 6.3%(900명)입니다.
이런 희생자 비율은 당시 제주도민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희생됐음을 보여주지요. 하지만 무도하고 잔악했던 국가권력에 항거했던 도민들의 정당한 저항이 아직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주4.3항쟁기념관>에 누워있는 백비는 국가폭력에 의한 우리 현대사의 수난과 현재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