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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백자채화인물무늬꽃모양접시 : 전쟁과 도자기

국립고궁박물관, 5월의 왕실 유물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립고궁박물관의 도자류 소장품을 보관하고 있는 수장고에는 순백자, 청화백자, 채색된 수입자기 등 다양한 형태와 무늬의 도자기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이 채색 접시입니다. 지름 12.2cm, 높이 2.1cm의 작은 크기인데도, 다른 자기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채색 그림이 돋보입니다. 꽃 모양[花形] 접시 가운데에는 검은 선으로 된 세밀한 도안에 채색한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은 도자기를 성형한 후 기면에 도안을 인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만든 나라는 일본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내용은 무엇이며, 어떤 배경이 담겨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그림에 그려진 네 명의 인물에 대해 알아보고 그림을 그린 작화가가 이들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묘사하고자 했는지의 표현의도에 대해서도 추측해 보려고 합니다.

 

 

접시 가운데 그려진 네 명의 인물은 각각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 “조선국왕”, “오오토리 공사(大鳥公使)”, “후쿠시마 중좌(福嶋中佐)”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등장인물을 통해 볼 때, 이 그림은 1894년 7월 10~15일에 열린 노인정회담(老人亭會談)을 그린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림에는 네 명의 인물이 회담장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모인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 이들이 모두 노인정회담의 현장에 참석했던 것은 아닙니다.

 

1.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년)

화면의 가장 왼쪽에 고개를 숙이고 위축된 자세로 그려진 인물의 머리 위에는 위안스카이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리훙장(李鴻章)의 북양군(北洋軍)을 기반으로 중화민국의 대총통이 되고, 종신집권까지 노리게 되는 인물이 왜 이렇게 초라한 자세로 묘사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는 19세기 말엽 청의 대조선관계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청군의 군사력을 믿고 일본군의 파병을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못하여 청일전쟁을 맞았고, 위안스카이 본인은 전쟁 직전인 1894년 6월 21일 본국으로 도망치듯 서둘러 돌아갔습니다. 청일전쟁 결과 청은 일본에 패하였고,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은 크게 감소했으며, 조선 조정에서는 친청적인 인물이 실각하고 친일내각이 들어섰으니, 이때 그의 대조선 정책은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2. ‘조선국왕’

단지 ‘조선국왕’이라고만 되어 있지만, 시기상 이 인물은 의심의 여지없이 고종(1852-1919년, 재위 1863-1907년)을 가리킵니다. 물론 ‘조선국왕’은 회담에 실제로 참석한 것이 아니라 조선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그려졌습니다. 실제로는 조선 조정을 대표하여 신정희 등 3인의 위원이 참석하여 일본 측의 오오토리 공사와 교섭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3. 오오토리 공사(大鳥公使;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1833-1911년)

오오토리 게이스케는 1893 ~ 1894년 10월 조선공사로 있으면서 일본의 대조선외교를 직접 수행한 인물입니다.

 

4. 후쿠시마 중좌(福嶋中佐)

이 인물은 후쿠시마 야스마사(福島安正, 1852-1919년)로 추정됩니다. 그는 1894년 2월 중좌로 진급하여 같은 해 6월 경성 공사관 소속이 되었고 1894년 8월에는 제1군 참모로서 청일전쟁에 참전했으며, 다음 해인 1895년 3월에는 육군대좌로 승진하였다고 합니다.

 

오오토리 ‘공사’와 후쿠시마 ‘중좌’의 관직 기록으로 볼 때 그림의 시점을 1894년 6~10월로 볼 수 있는 점, 오오토리 공사가 고압적인 자세로 조선의 내정에 대한 요구안을 제시하는 모습 등이 청일전쟁 전야의 노인정회담을 그렸다는 추정에 부합합니다. 다만, 사실과 달리 회담에 나오지 않은 위안스카이와 고종을 그려 넣은 것은, 청을 압도하고 조선 침략의 발판을 놓게 된 청일전쟁의 결과, 한껏 고양된 청에 대한 승리감을 반영했을 것입니다. 아울러, 도자제품의 구매자들에게 더 알려져 있는 인물을 모델로 내세우고자 하는 제작사의 필요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요.

 

그림의 내용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자면, 일본공사 오오토리가 조선 조정에 내정간섭적인 요구안을 들이밀게 된 배경에는 동학농민전쟁(1894~1895년)을 계기로 청ㆍ일이 각각 조선에 세력을 확대하고자 했던 상황이 있었습니다.

 

1894년 4월 23일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처음에 조선 정부의 대신들은 동학농민군을 쉽게 진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5월 10일 황토현에서 정부군이 대패하면서 사태를 심각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정부군을 이끌던 홍계훈은 중앙의 민영준에게 청군 파병 요청이 불가피하다고 보고했습니다.

 

조정 일각에서는 외국 군대를 끌어들이는 데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결국 민영준이 위안스카이를 찾아가 청군을 조선에 파병해 달라고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청국 정부는 조선 파병을 결정하고 톈진 조약(1885년)에 따라서 일본정부에 조선 파병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일본 또한 즉시 조선파병을 결정하여, 청일 양국 군대가 조선에 출병하게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수천 명의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였고 일본공사는 조선 측의 항의에도 일본군을 서울에 진입시켰습니다.

 

1894년 7월 초, 약 4,000명의 일본군이 서울로 진군한 상황에서, 일본공사 오오토리는 조선정부에 ‘내정개혁방안강목’을 제시하였습니다. 1894년 7월 10일, 11일, 15일, 남산에 있는 민영준의 별장 ‘노인정’에서 일본 대표 오오토리와 조선 조정을 대표하는 세 명의 특사가 만나 3차에 걸친 회담을 통해 일본의 요구안을 정식으로 거절하게 됩니다. 이 회담을 장소의 이름을 따 ‘노인정회담’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회담 이후 일본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 대원군을 앞세워 친청 내각을 붕괴시켰고 청과 일본은 상호 선전포고하여 청일전쟁의 막이 오르게 됩니다.

 

그러면 19세기 말엽 청일전쟁과 관련된 접시를 ‘인쇄해서’ 찍어냈다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 접시에 사용된 것처럼 도자기에 도안을 인쇄하는 방법은 공장제 요업이 발달하면서 나타났습니다. 예술작품으로서의 도자기와 달리, 제작단가를 낮춘 상업도자를 대량생산하여 시판함으로써 이윤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동판인쇄나 고무인을 찍는 방식으로 같은 도안의 도자기를 생산해 냈지만, 점차 전사(傳寫) 기법 등이 발달하여 더 정교한 도안의 도자기를 더 빠르게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청일전쟁 직후의 시점에서 보면, 도자기 전사 기법은 갓 도입된 최신 기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공장에서 실용품 또는 감상용 공예품으로서의 도자기 제품을 찍어내게 되자, 근대 일본의 요업 회사들은 대량기계생산을 위한 장식도자의 도안을 인기 있는 우키요에(浮世繪, 17세기에서 20세기 초, 일본 에도 시대에 성립된, 당대의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나 풍경, 풍물 등을 그려낸 풍속화의 형태) 화첩으로부터 차용해 오기도 했습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 일본은 수많은 전쟁을 겪었습니다. 세이난 전쟁(西南戰爭), 청일전쟁 등 일본 근대국가 형성기에 일본이 겪은 전쟁이 우키요에로 그려졌는데요, 이러한 도상들이 공장제 도자기 제품에도 반영되어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전쟁화 도안을 전사한 전쟁 기념접시 따위의 상품이 생산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채색접시와 같은 기물이 등장한 배경은, 제국주의로의 길을 걷고 있던 근대 일본의 정치적ㆍ문화적 환경과, 양산방식을 도입한 공장제 요업의 발달 등 여러 가지 역사적 조건이 맞물려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처럼 전쟁과 외교 같은 정치적 사건이 도자기 등의 제품으로 만들어져 대량생산ㆍ소비됨으로써, 도자기 그림은 일종의 매체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 시기의 예술품은 1940년대 총력전 체제의 국가적 예술동원과 같은 수준에서 평가할 수는 없지만, 대량생산 가능한 도자기와 같은 상품의 유통망을 통해 일본제국의 팽창을 전쟁과 외교에서 동떨어진 후방에 전파하는 기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참고문헌

유영익, 「Ⅲ. 갑오경장」 『신편한국사40-청일전쟁과 갑오개혁』, 국사편찬위원회. 2002

인천광역시립박물관, 『근대산업도자기 - 그릇, 근대를 담다』. 2009.

서유정, 「근대 일본도기회사 수출도자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강태웅 외, 『싸우는 미술-아시아‧태평양전쟁과 일본미술』, 아연출판부(고려대학교 아세안문제연구소), 2015

* 작성에 도움을 주신 곽희원, 서유정, 김형근님께 감사드립니다.

 

                                                                               박경지(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