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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내 마음 같은 ‘깊은 근심’이었을까?

수장고 속 왕실 유물 이야기(6월)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조선에서 관직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과거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자(子)’, ‘묘(卯)’, ‘오(午)’, ‘유(酉)’ 간지가 포함되는 해에 보았던 ‘식년시(式年試)’를 보면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지금 기준에 견주면 1차, 2차, 3차 시험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복시에만 합격하여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복시에 합격한 인원을 대상으로 임금 앞에서 성적순을 결정하는 시험을 치르는데, 이를 전시라고 했습니다. 이 전시에서 1등한 사람을 ‘장원급제’라고 부르게 됩니다.

 

전시는 ‘모화관’이나 ‘경회루’에서도 치렀지만 창덕궁 후원의 ‘영화당(映畵堂)’ 앞의 춘당대(春塘臺)에서도 치렀습니다. 왕 앞에서 치르는 만큼 시험에 임하는 선비들의 마음도 특별했을 것입니다. 춘당대에서는 나라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초시, 복시, 전시의 과정 없이 단 한 번에 과거를 보는 ‘춘당대시(春塘臺試)’도 있었는데요. 그만큼 영화당과 춘당대는 관직에 진출하려는 선비들에게는 꿈과 희망, 또는 두려움과 근심이 가득한 공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전시를 위해 임금이 머물던 영화당에는 선조, 숙종, 영조, 정조 등 여러 임금의 글씨가 담긴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 중에서 조선 제 14대 임금이었던 선조가 쓴 글씨를 새긴 현판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遠客座長夜 나그네는 긴 밤을 앉아

   雨聲孤寺秋 가을날 절에서 외로운 빗소리를 듣네

   請量東海水 동쪽 바다 물의 깊이를 재어 보게나

   看取淺深水 내 마음의 근심보다 깊은지 얕은지.

 

 

 

이 시는 당나라 때 시를 잘 쓰기로 유명했던 이군옥(태어나고 죽은 해 모름)의 <우야정장관(雨夜呈長官)>이라는 16행시의 처음 4행입니다. ‘동해 바다의 깊이는 잴 수 있어도 내 마음의 근심은 잴 수 없다’는 말로 깊은 근심을 느끼게 합니다. 없어진 부분도 있지만 4개의 현판은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우선 바닥판재(알판)의 바탕은 흰 색입니다. 글자는 돋을새김에 검은빛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바닥판재의 주변에는 테두리목(변)을 대었는데, 좌우와 상하에 돌출된 장식이 없는 ‘모판(木盤)’ 형태의 현판입니다. 테두리목은 철못으로 고정하였고, 가장자리는 물결 형태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테두리목에는 꽃무늬 따위를 화려하게 채색하였지만 떨어진 부분이 많습니다.

 

이 현판들은 다른 현판들에 비해 특별한 특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크기도 평범하고, 제작 기법도 화려하지 않습니다. 다만 현판을 건 의도가 궁금한데요. 왜 ‘먼 길 떠나온 나그네의 깊은 근심’을 이야기하는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과거시험을 치르던 장소에 걸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짓궂은 상상을 해보면 조금은 특별하고 재밌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 그것도 임금 앞에서 ‘장원 급제’의 영광을 꿈꾸었을 까닭에 이 현판들은 시험을 치르기 위해 모인 선비들의 초조하고 떨리는 근심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런 선비들을 바라보았을 임금은 자신의 치세를 이끌어갈 인재를 찾기 위해 골똘히 고민했을 것도 같습니다. 지금 시대로 바라보면 더 넓은 세상으로 비상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는 사회 준비생들의 깊은 근심 같기도 합니다.

 

‘간취천심수(看取淺深水)’. 내 마음 같은 옛 어른의 시 한 구절을 오래도록 바라봅니다.

 

                                                                                        심명보(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