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문화재

왕실 최고의 여성예복 적의(翟衣)와 적의본(翟衣本)

[큐레이터 추천유물 61]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적의는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여성만이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예복입니다. 적의는 적관(翟冠, 왕비의 법복에 쓰던 모자)과 하피(霞帔, 적의에 딸린 옷가지), 폐슬(蔽膝, 무릎을 가리는 아래 옷) 등 다양한 옷과 장신구를 갖추어 입습니다. 적의 제도가 처음 도입된 시기는 고려시대 공민왕 19년(1370)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명나라의 관복제도를 수용한 이후 약 세 차례의 변화를 거쳤습니다. 첫 번째는 조선 전기 명나라(明, 1368~1644)에서 받은 적의 제도, 두 번째는 명나라가 멸망한 뒤 조선이 자주적으로 만든 적의 제도, 세 번째는 대한제국 시기에 개정된 황실의 적의 제도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은 적의를 만들기 위한 옷본에 해당하는 것으로 꿩무늬가 12줄로 그려져 있는 12등 적의본입니다. 소매 부분은 없고 몸체 부분만 있으며 오색의 꿩과 오얏꽃[李花] 무늬를 그렸습니다.

 

 

 

 

왕비의 예복, 적의

 

조선 태종3년(1403)에 왕과 왕비의 관복 한 벌을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성조(成祖)에게 받았습니다. 이후 명나라로부터 왕비의 관복을 받은 것은 문종 즉위년(1405)부터 인조3년(1625)까지 15차례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받은 적의는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 적의와 함께 쓰는 모자), 대홍색 대삼(大衫), 꿩[翟鷄]을 수놓은 배자(褙子)와 하피(霞帔) 등 이등체강원칙(二等遞降原則, 중국의 품계보다 두 등급을 낮추어 대우한다는 원칙)을 적용한 명(明)의 명부일품복(命婦一品服)이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과 같은 형식의 적의가 갖추어진 것은 영조 26년(1750)입니다. 《국혼정례(國婚定例, 국혼에 관한 정식-定式을 적은 책)》와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에서 왕비의 예복으로 9등 적의 제도가 확립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제도는 조선말까지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후 조선의 임금은 구장복(九章服)의 면복을, 왕비는 9등 적의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명대의 것과는 조금 다르게 꿩무늬가 있는 대삼(大衫), 배자(褙子), 하피(霞帔), 폐슬(蔽膝) 등 다양한 옷과 장신구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대한제국(1897~1910) 시기에 이르면 황제국으로 독립하면서 황실에 걸맞게 관복제도가 개편됩니다. 고종 34년(1897) 6월에 황제국의 위상에 맞는 국가전례(國家典禮)를 정비하였고, 이에 따라 고종은 10월에 황제의 복장인 12장 곤면복(袞冕服)을 입고 황제로 즉위하였습니다. 이에 맞추어 적의 제도도 9등에서 12등 적의로 바뀝니다.

 

현재 적의는 모두 3점만이 남아 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이 9등 적의를, 세종대학교박물관이 12등 적의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의 9등 적의는 1922년 근현례(궁에서의 폐백)에서 영친왕비가 입었던 옷이며, 서울역사박물관의 적의는 입은 이가 밝혀지지 않아 운현궁의 유물이라고만 알려져 있습니다. 세종대학교박물관의 12등 적의는 기미년(1919) 영친왕의 가례를 위해 새로 만든 순종 윤황후의 옷입니다.

 

 

적의 제작을 위한 옷본, 적의본

 

적의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것이 유일하며, 폐슬본과 함께 국가민속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실제 입은 이는 알 수 없으나 세종대학교박물관에 있는 순정효황후(1919)의 12등 적의와 거의 비슷합니다. 이 적의본은 한지를 여려 겹 풀칠하여 만들었습니다. 실물과 거의 같은 크기와 형태나 양쪽 소매는 달려있지 않습니다.

 

옷본의 세부를 보면 엷은 청색 바탕에 한 쌍의 오색 꿩을 서로 마주보도록 전체에 그려 넣었고, 꿩의 무늬 사이에 배꽃 무늬를 배치하였습니다. 꿩무늬가 12줄로 배열되어 있어 황후의 적의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랫부분의 도련과 옷깃에는 붉은색 종이로 선을 둘렀는데, 종이에 금물로 용과 구름을 그렸습니다.

 

배꽃 무늬와 관련하여 문헌에서는 이러한 형식의 꽃무늬를 소륜화(小輪花)라고 하였습니다. 처음 적의 제도가 생긴 뒤 참고할 만한 예가 없었기 때문에 《대명회전(大明會典, 명나라의 여러 법령을 집대성한 종합적인 법전)》의 적의 제도나 구장복의 화충문(華蟲紋, 절의(節義)를 뜻하는 꿩 무늬) 등을 참고하여 도안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서울역사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의 9등 적의는 가운데 붉은색 원을 중심으로 흰색의 작은 원이 5개가 둘러져 있습니다. 그 주위로 5장의 꽃잎을 다시 둘러서 작은 꽃무늬를 만들었습니다. 세종대학교박물관의 12등 적의와 국립중앙박물관의 적의본에는 가운데 작은 꽃 도안이 없어지고 흰색의 꽃술로 바뀝니다. 그리고 둘레에는 흰색과 붉은 색의 꽃잎을 둘러 대한제국의 상징인 배꽃(이화)무늬를 표현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옷을 만들 때는 직물 전체에 무늬를 그린 다음 재단하지만, 적의는 길, 소매, 섶 등의 무늬를 미리 생각하여 배치한 뒤 따로 재단하여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무늬의 간격이 조금만 달라도 꽃의 형태가 어긋나 일렬로 맞게 구성하기 위해서는 따로 재단하여 조절하면서 만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적의본은 적의를 제작하기 위한 옷본으로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늬를 맞추기 위해서도 필요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적의본은 12등 적의본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조선 말기의 적의를 재현하는 데 귀중한 자료입니다.

 

 

                             * 국립중앙박물관(민보라) 제공                         

                               위 내용과 자료는 국립중앙박물관의 허락 없이 가져가실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