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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탈핵 실크 로드’ 네팔 방문기

먼지 이는 흙길, 복면강도처럼 보이다

네팔 방문기 (10) 2월 10일 토요일
순례단, 먼지나는 흙길 16km를 맨발로 걷기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오늘도 새벽 예불에 참여했다. 만물이 깨어나기 전 캄캄한 새벽에 산사의 법당에서 진행되는 예불의 분위기는 매우 경건하며 사람의 마음을 신비하게 흔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내가 20대 청년이었을 때에 내장산 백양사에서 처음으로 새벽 예불을 경험한 이후, 나는 누구에게나 불교의 진면목을 경험하려면 새벽 예불에 꼭 참석해 보라고 권하고 있다.

 

한국의 불교가 때로는 일부 승려들의 일탈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래도 무너지지 않는 것은 경건한 새벽 예불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기독교가 세습이니 기복이니 하는 부작용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는 것은 열성적인 새벽 기도회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오늘은 순례자 세 명이 정식으로 실크로드 순례길을 걸었다. 아침 8시 30분에 대성석가사를 나와서 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일반 버스를 타고 룸비니 공항으로 16km를 이동하는데 거의 한 시간이나 걸렸다. 지난 번 순례의 끝 지점이 룸비니 공항이었는데, 공항의 정식 이름은 가우탐 부다 공항이었다. 오늘 아침 9시 30분부터 낮 3시까지 16km를 걸었는데,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서 고생을 하였다. 도로가 비포장이어서 흙먼지가 풀풀 났다. 미세 먼지나 황사 수준이 아니고 차가 지나가면서 흙먼지가 일어나면 10m 앞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우리 세 사람은 5m 간격을 두고 깃발을 들고서 일렬로 걸었다. 맨 앞에 병산이 가고 그 다음에 내가 따르고 하라상이 맨 뒤에서 걸었다. 길 옆 풍경은 우리나라 60년대를 연상하면 딱 맞을 것이다. 카트만두 시내와는 풍경이 아주 달랐다. 길옆에는 커다란 가로수들이 서 있는 곳도 있었다. 농토 사이로 허름한 집들이 가끔 나타나는데, 대부분 벽돌로 지은 작은 집이었다. 가끔 가게가 나타나는데 우리나라 편의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간이 작고 진열된 상품도 초라했다.

 

과일을 파는 노점상도 종종 보이는데, 바나나와 망고 사과 석류 등을 조금 진열해 놓고 팔았다. 조그만 탁자 위에 생수병만 10여개 쌓아 놓고 파는 노인도 있었다. 가끔 농가도 보이는데 소나 닭이 보이는 농가는 부농일 것이다. 때로는 물소도 보이는데, 물소는 뿔이 활처럼 휘어져서 일반 소와 구별이 되었다. 힌두교에서 소는 신성한 동물로 여기지만 물소는 소와 종류가 달라서 식용으로 기른다고 한다.

 

먼지가 너무도 많이 나서 나는 손수건을 꺼내어 입을 가리고서 목 뒤로 묶었다. 손수건을 입에 두른 내 모습을 보더니 직설적인 화법을 쓰는 병산이 한 마디 한다.

“복면강도처럼 보입니다.”

“네? 복면강도? 아이고 먼지가 너무 많이 나서...”

“우리는 순례자입니다.”

“...”

 

우리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여행자가 아니고 고행을 감수하는 순례자라는 의미로 들렸다. 그래서 나는 손수건을 벗었다. 약간 이견이 있더라도 순례단장의 의견을 존중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네팔 남부의 2월 시골 풍경은 우리나라와 달랐다. 겨울밀이 자라는 곳은 파랬다. 때로는 유채꽃 같은 노란 꽃이 피어있는 곳도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유채가 아니고 겨자란다. 겨자는 기름을 짜기도 하고 또는 카레 음식의 재료로 쓰기도 한단다. 작년에 벼를 수확하고 볏단을 낟가리로 쌓아둔 곳도 있었다. 이곳은 위도가 우리나라보다 낮기 때문에 이모작이 가능한데, 대개는 겨울에는 밀을 심고 여름에는 벼를 심는다고 한다.

 

 

 

 

부처님은 2,500년 전에 내가 보는 똑같은 풍경을 보고 내가 걷는 똑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먼지 나는 흙길을 맨발로 걸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이 길을 걸으면서 인생의 고통과 행복, 번뇌와 해탈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였을 것이다. 부처님은 제자들과 함께 쌀이나 밀을 재료로 한 조촐한 식사를 했을 것이다.

 

2,500년 전 과거로 돌아가 이러한 생각을 하는데, 병산이 작은 가게를 발견하고 여기서 점심을 먹자고 한다. 작년 5월에 서울을 떠나 지금까지 거의 4,000km를 걸은 병산은 매우 유능한 경영자이다. 숙소 예약과 교통편 알아보기, 식당을 찾는 일 등등 모든 일을 혼자서 스마트폰(슬기전화)의 도움을 받아서 척척 잘도 해낸다. 그는 여행비용을 절약하는 방법도 잘 안다. 그는 라면을 3개 가게 주인에게 주면서 끓여달라고 부탁한다. 달걀을 넣어달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조금 후에 우리는 맛있는 라면을 먹을 수 있었는데, 병산은 가게 주인에게 수고비로 200루피(우리 돈으로는 2,000원)를 주었다.

 

식사와 관련된 부처님의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석가모니는 19살에 야소다라 공주와 혼인을 한다. 석가모니는 출가를 고민하다가 29살이 되어 부왕에게 출가하겠다고 말하려는데 이 무렵 아들이 탄생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석가모니는 “라훌라자토!”하며 탄식했는데, 이는 “장애가 생겼다”는 뜻으로 아들의 탄생은 출가를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장애’라는 의미의 ‘라훌라’라고 짓는다. 한편으로 석가모니는 자기 대신 왕위를 이어받을 후계자가 태어났으니 이제야말로 정말 출가의 기회가 온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에 아들 라훌라는 출가하여 10대 제자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부처님을 비롯하여 수행자는 하루에 한 끼만 먹었다. 탁발을 해서 식사를 해결하니 충분한 식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라훌라는 유독 배고픔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부정에 이끌린 석가모니는 결국 하루 두 끼 식사로 수행자의 규칙을 바꾸었다. 매우 인간적인 모습의 석가모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라훌라와 비슷한 이야기로 성철 스님 이야기도 흥미롭다. 성철 스님은 경남 산청의 부자집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20살에 혼인하였다가 23살에 출가하였다. 출가하고 얼마 지나 세속에 떨치고 온 부인이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풍문으로만 들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딸은 성장하여 나중에 출가를 하는데, 성철스님은 딸에게 불필(不必)이라는 법명을 주었다고 한다. 불필이라고 하면 불필요하다는 의미로 해석되니 라훌라가 장애라는 뜻과 비슷하다.

 

어쨌든 우리는 라면으로 맛있는 점심을 먹은 후 다시 걸었다. 오후에도 계속 먼지를 마시면서 걸었다. 낮 3시 쯤 우리는 대성석가사로 돌아왔다. 조금 쉬다가 나는 저녁 예불에 참여하고 저녁 공양을 하였다.

 

대성석가사에는 네팔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일을 하였는데 그 중에는 맨발인 사람도 있었다. 내가 네팔에 와서 놀랐던 것이 하나 있다. 대도시인 카트만두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시골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네팔 사람 중에는 맨발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맨발이 많고 어른들도 맨발이 있었다. 신발을 신은 사람은 아주 조악한 슬리퍼를 신었다. 운동화를 신은 사람은 10명 중에 1명이나 있을까? 시골에서 구두를 신은 사람은 한 번도 보지를 못했다.

 

지금도 맨발로 걷는 사람이 많은데 2,500년 전 석가모니는 맨발로 걸었을 것이다. 정말 그랬을까 미심쩍어서 나중에 내가 아는 불교 법사에게 물어보니 그 당시는 모두 맨발로 다녔고, 석가모니도 물론 맨발이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석가모니는 특히 평발이었기 때문에 불법을 전하는 전도 여행이 매우 고통스러운 수행이었을 것이란다.

 

생각해 보면 인류 역사에서 신발이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일 것이다. 아직도 뉴기니아 또는 아마존 강 유역에 사는 원시 종족들이 맨발로 다니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다. 인류 역사가 200만 년이라고 하지만 농사가 시작된 것은 불과 1만 년 전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니까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인류는 채집과 수렵 생활을 오랫동안 했는데, 그때는 모두 맨발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발은 오랫동안 맨발 상태로 흙과 접촉하며 생활하는 데 익숙했고, 인간의 유전자에는 맨발이 정상적인 상태로 각인되어 있었을 것이다. 농사를 시작한 이후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나막신이나 짚신 등을 만들어 신었다. 발바닥은 더 이상 맨땅에 닿을 수가 없게 되었다. 멋진 가죽 구두가 등장하면서부터는 공기도 잘 통하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발의 상태가 자연 상태에서 멀어지자 나타난 것이 무좀이라는 병이 아닐까?

 

내가 무좀에 관한 실험을 직접 해 본 적이 있다. 이십 여 년 전에 나는 서울 강남구 일원동에 살고 있었는데 무좀이 생겼다. 당시만 해도 나는 일찍 일어나서 아침 식사 전에 한 시간 정도 앞산인 대모산에 갔다 왔다. 어느 날, 무좀을 없애려면 발을 흙과 접촉시키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맨발로 등산을 시작했더니 얼마 후에 시나브로 무좀이 나았다. 그 후에 나는 무좀에 걸린 사람을 만나면 꼭 맨발로 걸으라고 조언을 한다. 허나 사람들은 대부분 나의 조언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좋은 줄을 알면서도 실천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도 무좀이 있으면 맨발로 걷기를 강력히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