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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첩첩산중 무주 적상산 꼭대기 안국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은 산이 많은 나라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되어있어 농업을 주 산업으로 생활했던 옛날에는 논농사지을 수 있는 평야지역이야말로 누구나 살고 싶은 곳이었다. 조선의 평야지역은 서남해안으로 펼쳐진 전라도였고, 그 전라도가 조선사람들을 먹여살렸다.

 

그런데 이곳 무주는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이 동쪽으로 흘러 금강산 설악산으로 등줄기처럼 뻗어내려 태백산 소백산을 지나 지리산까지 흘러가는 도중 덕유산자락에 솟아났다. 지역적으로 이곳은 전라도와 경상도가 경계가 되는 산간지역으로 한국에서는 그 어느지역에 못지않게 두메산골로 유명하다. 이곳 무주가 속한 곳을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를 줄임말로 임산자원이 풍부하다는 뜻도 있음)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이처럼 두메산골이기에 조선왕조시대 왕조의 가장 중요한 보물인 왕들의 재임동안 모든 통치기록을 자세하게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할 장소로 선택되어, 이곳에 적상산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왕조실록의 제작과 보관에 대한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태조 이성계가 창건한 후 기록하기 시작한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이전에 한양도성에는 춘추관사고를 시작으로, 충주에 개천사사고, 전주에 경기전사고, 그리고 성주에 또 하나의 사고가 있었다. 그중 성주산사고는 임진왜란 이전 1538년 11월 화재로 제일 먼저 사라졌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 국토가 전란에 휩싸이자, 귀중한 사고는 대부분 무방비상태가 되었다. 그가운데 전주사고를 지키던  참봉 오희길은 왕조의 통치기록인 실록을 지켜야 된다는 사명감에 인근에 살던 선비 손흥록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였다. 손흥록은 흔쾌히 자신의 말 20필에 경기전에 보관되었던  전주사고를 실어 정읍 두메인 내장산 은봉암으로 옮겼다가, 다시 더욱 깊숙한 내장산 신성봉아래 절벽에 뚫여있던 용암굴로 피신시켰다. 이렇게 하여 전란이 끝날 때까지 전주사고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주사고 말고 3곳의 사고는 임진왜란 중 모두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끝이난 뒤 조선왕실에서는 정읍 내장산에 보관되었던 전주사고본을 가지고와 전체적으로 내용을 다시 검토하고 그가운데 오류가 발견된 것을 수정하여 교정본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수정본을 다시 3질 더 만들어 조선왕조실록은 전체 5질의 실록이 되었다.

 

이렇게 5본이 된 조선왕조실록은 강화도 마니산에 전주사고원본을, 오대산(월정사)에는 전주사고 교정본을, 묘향산과 태백산 그리고 춘추관에는 교정본을 본으로 추가로 펴낸 3질을 봉안하였다. 이들 사고보관소의 위치를 살펴보면 춘추관사고를 제외한 사고는 그야말로 한국내 가장 첩첩산골인 곳으로 어떤 전란속에서도 불타지 않을 곳을 택하여 사고보관소로 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이난 뒤 불과 40년되 되지 않아 병자호란을 당하게 되자 마니산 사고가 청군에 의하여 손상을 입게되자, 마니산사고는 강화 정족산(전등사)으로 옮기고, 묘향산사고는 청나라의 위협에 손상을 염려하여 무주 적상산(호국사 현재 안국사 근처)로 옮겼으며, 한양 춘추관에 있던 사고는 이괄의 난에 불타버리고 말았다.

 

조선왕조시대 임금의 행적을 세세히 기록하여 이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그 가치를 발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이지만, 지금처럼 남기 까지에는 많은 사람들의 피땀어린 수고가 들어있는 것이다. 특히 이들 사고를 지키기 위하여 첩첩산중에 있었던 절들에 그 수호의무를 부과하고, 스님들은 불경공부 선수행보다도 오히려 사고를 보관하는 일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였다. 그것이 스님들의 생명을 지키고 절을 유지하는데 큰 힘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묘향산에서 옮겨온 무주 적산산사고의 근처에는 사고를 지키는 호국사가 있었다. 그러나, 호국사는 사라졌고, 그 아래 있던 안국사는 적상산 꼭대기 근처에 양수발전소 건립을 위하여 댐을 만들어 물이 채워지자 적상호(赤裳湖)로 변하면서 그 위치를 호국사지로 옮겨짓게 되었고, 사고지 또한 위치를 옮겨 지금처럼 다시 복원하였다. 현재의 안국사는 본래 호국사터에 전각들을 옮겨지어 이루어진 것이다.

 

이곳이 사고(史庫)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산이 많은 한국이지만, 산중에서도 가장 찾기 힘든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귀중했던 조선왕조실록은 없고, 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건물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불타버렸던 것을, 그 역사를 기억하고자 사고(史庫=역사를 기록한 창고)를 다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사고의 안위를 책임지던 절은 그 임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런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6월 중순 적상산의 신록은 푸르고,  적상산 꼭대기에 있는 안국사에 이르는 길은 잘 닦은 아스칼트포장길이지만 그야말로 사륜구동 스포츠유틸리티도 헐덕거릴만큼 험하기만 하였다.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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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