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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행당동 아기씨당 (1) - 역사적 유래와 명칭

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23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행당동 아기씨당에 대한 역사적 유래 또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그 실체를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문제점은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마을당의 경우와 마찬가지여서 아기씨당을 포함한 전국 마을당에 관한 역사적 실체를 명확하게 밝히는 일은 간단치가 않다. 그러함에도, 행당동에 있는 아기씨당 건축물 봉건기의 기록이라던가 3대째 아기씨당을 관리하면서 당굿 의례를 담당하고 있는 당주 구술을 토대 삼아 그 실체를 더듬어 볼 수가 있다.

 

① 다음은 아기씨당 건축물 봉건기의 내용이다. 이 봉건기가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과거에 있었던 것으로써 현재는 사진 자료와 조사보고서로만 남아 있다.

 

   <阿祈氏堂奉建記>

   本祠宅杏堂洞居民崇

   拜地神之祠也奉載筆

   源往昔渺然未詳正確

   然祠宗少建物形態與

   歷代傳言綜合則推祭

   二百年前奉祠也舊祀

   宗年久頹落不禁恐戄

   故有意人士誠出物心爰

   建新宗宣敬神之道殆

   解宿念 伏願

   神安保佑衆民育畜

             檀紀四二八O年 丁亥 三月二日起工

             同年 四月 十五日 上樑

             同年 五月 二十九日 落成

             總工費 二十五萬圓有志獻納

                       造成委

             檀紀 四二八O年 四月 十五日

            杏堂洞會 總成員(이문웅 ‘제2편 민간신앙’ 《한국민속종합보고서》 (서울 편) 문화관광부 문화재관리국 79쪽 1979)

 

이 봉건기 기록에 따르면, 이 사당은 단기 4280년(1947년) 당시 행당동 유지들이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그 역사는 약 200여 년 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이 사당은 지금으로부터 약 270여 년 전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② 현재 이곳 아기씨당을 3대째 지키면서 당굿을 주관하고 있는 당주 김옥렴여사가 구술한 내용이다. ‘옛날 북쪽에 전쟁이 나 궁에 계시던 분들이 난리 통에 뿔뿔이 헤어지셨는데 공주 오 형제분이 이곳으로 피난을 나오셨다. 산 찔레 필 무렵인데, 뒤에는 산이 막고 앞으로는 강이 있어 더는 나가지 못하고 이곳에 수풀도 많고 하니까 이곳에 숨어 지냈다.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 나무뿌리를 캐서 잡수시다가 숨어 사셨는데 그만 산 찔레를 따서 잡수시다가 산 찔레를 입에 물고 돌아가셨다. 그 후, 이곳에 집이 한두 채씩 생겨 마을이 생겼다. 그런데 어느 날 이장 같은 분의 꿈에 공주가 현몽하여 당신들(공주들) 한을 풀어달라고 하여 그때부터 이분들을 모시고 굿을 해주었다. 다섯 형제분 중 이곳 살군당에 한 분 모시고 양지동에 한 분 모시고 나머지 세분은 수풀당에 모셨다’(2004년 김옥렴 구술). 이 구술에 따르면, 이곳에서 무속 의례를 지내게 된 역사는 상당히 길다.

 

③ 다음은 행당동 애기씨당에 관한 인터넷 자료 내용이다. ‘옛날 이곳에 공주가 살았는데,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자 자신도 세상을 비관해 시집가지 않은 채 앓다가 죽었으므로, 동네 사람들이 그녀의 원혼을 위해 사당을 짓고 영정을 모셔 제사를 지냈다.’ 이 자료에 대한 출처가 분명치 않고 현재의 당주가 구술로 증언하고 있는 내용과는 차이가 있지만, 행당동 아기씨당과 관련된 자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상과 같이 몇 가지 사례를 통해 그 실체를 파악하여 본 결과, 행당동 아기씨당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굳이 그 시기를 거론한다면,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약 270여 년 전부터 지금의 건축물처럼 전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행당동 아기씨 당굿은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이미 거행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다.

 

한편, 행당동 아기씨당은 인근에 있었던 양지동 아씨 당(일명 양지당)과 수풀당 부인마마당(일명 수풀당) 등과의 연관 선상에서 존재해 왔었다. 수풀당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당굿은 끊긴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양지당은 70년대 산업화 및 도시화 물결 속에서 흔적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과거 이곳 세 개의 당이 모두 존재했을 때는 제일 큰집이 행당동 아기씨당이었고 둘째 집이 양지 당이었으며 막내 집이 수풀 당이었다.

 

김옥렴 만신에 따르면, 큰 집과 둘째 집에 모셔진 아씨는 각각 결혼하였지만 수풀당에 계시는 세 분은 미혼이라고 한다. 이곳 왕십리 일대 세 곳 당에서는 이들을 전통사회에서 두려워했던 천연두 곧 마마를 막거나 물리치는데 역할 하였던 두신(痘神) 마마로 받들어졌었다. 그러면서 이 세 곳에서는 마마 배송을 전담하였던 굿당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한편, 전통사회에서의 마마 배송은 인근에 있었던 안정사(청련사)에서도 불교 의례로 치러지기도 하였다.

 

 

오늘날 당집 구실이 살아 있는 행당동 아기씨당은 ‘진퍼리 살군당 부인마마당’ 또는 ‘행당동 아기씨당’으로 불렸다. 진퍼리라고 했던 것은 당 주변 지역이 쌀농사가 할 수 있는 질퍽한 지형이었기에 그렇게 불렸다. 살군당이라는 명칭은 이 일대에 살구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그리고 이곳에 부인 마마를 모셨기 때문에 ‘진퍼리 살군당 부인마마당’이라고 하였다. 한편, 행당동(杏堂洞)은 살구나무 한자 표기 행(杏)과 이곳에 있었던 당집과 겹합되어 붙여진 명칭이다. 당집 정문에 ‘阿祈氏堂’라고 한자로 쓴 간판이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