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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짚신, 양반과 평민이 함께 신던 평등의 신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87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짚신은 볏짚으로 삼은 신발이며, 초혜(草鞋)라고도 합니다. 또 짚신과 같은 모양이지만 삼[麻]이나 노끈으로 만든 것을 ‘미투리’라 하며 이는 짚신보다 훨씬 정교하지요. 그밖에 왕골이나 부들로 만든 짚신도 있었습니다. 중국 최초로 역대 제도와 문물을 기록한 《통전(通典)》 변방문(邊防門) 동이(東夷) 마한조(馬韓條)에 ‘초리(草履)’가 나오고, 중국 진나라 역사서 《진서(晋書)》 사이전(四夷傳) 마한조에 ‘초교(草蹻)’가 나옵니다. 또 송나라 마단림(馬端臨)이 쓴 《문헌통고(文獻通考)》 에서 “마한은 초리(草履)를 신는다.”라고 했는데 초리, 초교 모두 짚신을 일컫는 것으로 이를 보아 짚신은 이미 삼한시대부터 신었던 것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그의 책 《성호사설》에서 “왕골신과 짚신은 가난한 사람이 늘 신는 것인데 옛사람은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선비들은 삼으로 삼은 미투리조차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니, 하물며 짚신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라고 개탄합니다. 이익의 개탄처럼 조선 후기로 오면서 짚신 신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풍조가 생겼지만 그 이전엔 정승을 했던 선비들도 짚신을 예사로 신었을 정도로 짚신은 양반과 평민이 함께 신는 ‘평등의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20년 일본을 통해 질기고 물이 새지 않는 고무신이 들어와 인기를 끌면서 짚신이 위기에 빠졌고, 이에 조선에서는 농민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선 짚신 다 죽는다’며 고무신 불매운동이 벌어졌지요. “조선 사람 손으로 맨드러진 신(草鞋·초혜)을 벗고 이 고모신을 신는 것은 민족의 경제적 파멸 과정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고무신 배척운동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짚신과 고무신 모두 추억의 유물이 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