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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드리개’ - 관 꾸미기의 완성

[큐레이터 추천유물 63]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드리개는 장식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 신체에 매달아 늘어뜨린 모든 것을 말합니다. 가령 관(冠)에 매달면 관 드리개, 허리띠에 매달면 허리띠 드리개라 하고, 심지어 말의 몸에 돌린 띠에 매달면 말띠 드리개라 합니다. 이 중 관에 매단 것을 흔히 드리개로 줄여서 표현하며, 소재가 대부분 금이기 때문에 금드리개라고도 부릅니다.

 

금드리개는 관테에 매단 경우가 많지만 서봉총 금허리띠를 장식한 굵은고리 귀걸이(또는 드리개)의 예와 같이 신체를 장식하는 여러 곳에 다양하게 쓴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는 관테에 매단 드리개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신라 마립간기(4세기 후반∼6세기 전반)의 장례 풍습을 보면, 금드리개는 주인공의 신분에 따라 수량과 장식에서 차이가 납니다. 최고의 신분(마립간과 일족)이 착용한 금관에는 화려한 금드리개를 매달지만 가죽이나 베 등 유기물로 만든 하위 신분의 관에는 단순한 금드리개 한 쌍을 매달거나 이마저 생략하기도 합니다.

 

물론 주인공의 신분을 알 수 있는 핵심적인 것은 금관과 금허리띠 같은 주요 장신구입니다. 최고 신분은 금으로 만든 관과 귀걸이, 대도(大刀), 목걸이, 허리띠, 팔찌, 반지를 모두 착용한 반면 그 보다 낮은 신분은 금동 장식을 쓰거나 착장품(着裝品) 중의 일부를 착용하지 못했습니다. 드리개는 주 장신구를 장식하는 부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관이 모두 썩어 남아 있지 않은 경우는 착용자의 신분을 파악할 수 있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금관을 장식한 드리개

 

황남대총(98호분) 북분(5세기 후반) 금관(국보 제191호)에 매단 세 쌍의 드리개는 화려함의 극치이며, 지금까지 발굴한 신라 드리개 가운데서도 유일한 사례입니다. 이는 이 금관과 드리개를 쓴 여인이 마립간의 부인이라는 신분을 넘어 왕족 중에서도 으뜸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드리개는 여인 얼굴의 윤곽에 맞게 두 쌍을 짧게 매달고, 나머지 한 쌍은 길게 드리웠습니다(31㎝). 가장 안쪽 드리개의 한 쌍은 끝(드림)을 푸른빛 곡옥으로 장식하여 화룡점정을 찍었습니다.

 

드리개는 중심고리[主環], 샛장식[中間飾], 드림[垂下飾]의 순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중심고리는 굵은고리 귀걸이와 같이 금판을 말아서 만들었습니다. 샛장식은 양쪽에 고리가 있는 아령 모양의 몸체 여러 조를 연결하여 뼈대를 만든 뒤, 여기에 달개가 달린 금사 여러 개를 코일처럼 꼬아서 붙였습니다. 드림은 반구체(半球體)에 펜촉 모양의 금판과 곡옥을 붙였습니다. 반구체에는 테두리를 따라 돋을새김 무늬를 장식하였는데 세밀한 금세공이 돋보입니다.

 

금관총 금관(국보 제87호)의 드리개는 측면부에 한 쌍이 매달려 있어 황남대총 북분 드리개에 견주어 화려함이 조금 덜합니다. 드리개의 길이는 약간 짧고(27.3㎝), 제작 방식도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중심고리는 가는고리로 만들었습니다(가는고리는 귀걸이와 마찬가지로 남성을 상징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샛장식은 금사를 사슬처럼 길게 꼬아서 몸체를 만들고, 여기에 고리를 여러 개 붙여 만든 우산 모양의 장식체를 연속으로 붙인 뒤 달개를 촘촘히 매달았습니다. 드림은 용 얼굴 새김 금장식을 씌운 곡옥을 사용했습니다.

 

금관총은 황남대총 북분보다 조금 늦거나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마립간 일족의 능묘이지만, 규모나 부장품의 내용은 그에 미치지 못합니다. 금관총의 주인공은 황남대총 북분에 묻힌 부인에 비해 신분이나 사회적 위치가 낮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기물로 만든 관(冠)을 장식한 드리개

 

신라 능묘 발굴에서는 주인공의 머리 쪽에서 금드리개만 발견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이 경우는 관(冠)을 가죽이나 베와 같은 유기물로 만들었기 때문에 모두 썩어 없어진 것으로 짐작됩니다.

 

경주 월성로 가지구 13호(1985년 발굴) 금드리개는 지금까지 발굴한 것 가운데서 가장 이른 시기(4세기 후반)에 해당합니다. 중심고리는 굵은고리로 만들었습니다. 샛장식은 아령 모양으로 꼬아 만든 금사 13조를 연결하여 몸체를 만든 뒤 달개를 촘촘히 붙였습니다. 드림은 반구형과 구형 장식 아래에 속이 빈 원추 모양 장식을 매달았는데, 여기에 돋을새김 무늬와 남색유리 장식을 추가했습니다. 이 드리개의 길이(26.4㎝)와 화려함은 앞에서 말한 금관총 드리개에 못지않습니다.

 

무덤의 주인공은 왕족 또는 여기에 버금가는 신분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최상위 신분을 암시하는 금 그릇과 원거리에서 수입한 유리잔을 소유했으며, 주변에는 순장으로 추정되는 사람 4명이 함께 묻혀있었습니다. 어쩌면 주인공은 황금복식(금관, 금허리띠 등)을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시기에 죽었기 때문에 금(동)관을 착용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늦어도 5세기 이후부터는 황금복식을 사용합니다).

 

 

경주 미추왕릉 C지구 4호(1974년 발굴) 금드리개(보물 제633호)는 모양이 여러 면에서 독특합니다. 이 드리개는 길이가 상대적으로 많이 짧고(16.8㎝) 중심고리가 없습니다. 샛장식은 달개가 달린 금구슬을 연결하여 만들었습니다. 금구슬은 주로 목걸이나 가슴걸이의 소재로 쓰는 것인데, 반구형 두 개를 붙인 뒤 위아래에 구멍을 뚫어서 서로 연결합니다. 드림은 금을 사용하지 않은 대신 비취색의 곡옥을 매달았습니다.

 

이 무덤의 껴묻거리 가운데는 상감유리옥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남색 유리구슬 안에 사람 얼굴 등 여러 가지 그림을 상감한 것은 서역 유리의 전통이며, 지중해 연안이나 인도네시아 자와(Jawa) 섬 등에서 만들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무덤의 주인공은 금관이나 금동관을 쓸 정도의 신분은 아니었지만, 굵은고리 금귀걸이를 착용하고 수입 유리구슬을 소유했다는 점에서 높은 신분의 귀족 여성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국립중앙박물관(운온식) 제공                         

                               위 내용과 자료는 국립중앙박물관의 허락 없이 가져가실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