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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한ㆍ중 외교사 보물 《봉사조선창화시권》국보 승격

《이익태 지영록》 등 4건 보물 지정 예고도 함께
보물 제455호는 이름 바꿈(경주 황오동 금귀걸이→경주 노서동 금귀걸이)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은 보물 제1404호 《봉사조선창화시권」 등 2건을 국보로 승격하고, 《이익태 지영록」등 조선 시대 서책과 불교 조각, 신라 시대 금귀걸이 등 4건에 대해 보물로 지정 예고하였다. 아울러, 보물 제455호인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의 명칭을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로 변경하기로 예고하였다.

 

국보로 승격되는 《봉사조선창화시권(奉使朝鮮倡和詩卷)》(보물 제1404호)은 1450년(세종 32년)에 명나라 경제(景帝, 재위 1450∼1457)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조선에 사신으로 온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 예겸(倪謙, 1415∼1479)이 원접사(遠接使)로 나온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성삼문(成三問, 1418~1456) 등과 서로 주고받은 글 37편이 수록된 총길이 16m에 달하는 두루마리이다.

* 봉사조선창화시권: 조선에 사절단으로 온 중국 외교관이 조선 문사들과 시문을 주고받은 글을 기록한 두루마리라는 의미

* 조서(詔書): 국왕의 명령이나 뜻을 백성이나 다른 나라에 알리는 문서

* 원접사(遠接使): 조선 시대 중국 사신을 맞아들이던 임시 직책. 보통 언변이 뛰어나거나 문장 실력이 좋은 관리를 발탁했음

 

 

이 시권(詩卷)은 예겸에 의해 본래 시책(詩冊)으로 만들어졌으나 청나라 때 두루마리 형태로 다시 꾸몄고, 1958년 무렵 국내로 들어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등 당시 쟁쟁했던 문화재 애호가와 학자들의 감정(鑑定)을 받았다. 그때 작성된 감정기록이 지금도 전해오고 있어 작품의 가치와 역사적 의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오늘날 친필이 거의 전하지 않는 정인지ㆍ성삼문ㆍ신숙주가 쓴 글씨를 전서ㆍ예서ㆍ초서 등 다양한 서체로 확인할 수 있고 이들의 기준작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조선 전기 서예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전서(篆書): 고대 서체 중 하나로 가장 예스런 형태이자 예서 이전에 쓰인 서체

* 예서(隸書): 중국 한나라 때부터 쓰인 옛 서체, 자형이 반듯하고 각이 진 것이 특징

* 초서(草書): 중국 한나라 초기부터 쓰인 서체로 곡선 위주의 흘림체인 서체

 

아울러 명나라 사신과 조선의 관료가 문학 수준을 겨루며 양국 간의 외교를 수행한 일면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한ㆍ중 외교사에 있어 큰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이번에 같이 국보로 승격되는 《비해당 소상팔경시첩(匪懈堂 瀟湘八景詩帖)》(보물 제1405호)은 1442년(세종 24)에 비해당 안평대군 이용(匪懈堂 安平大君 李瑢, 세종의 셋째아들, 1418~1453)이 주도하여 ‘소상팔경(瀟湘八景)’을 주제로 당대 문인 21명의 글을 모아놓은 시첩이다.

 

* 소상팔경(瀟湘八景): 중국 호남성(湖南省) 동정호(洞庭湖) 남쪽에 있는 소상(瀟湘)의 여덟 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일컫는 것으로, 동아시아에 있어 문학과 그림으로 많이 다루어진 주제

* 첩의 앞부분에 수록된 이영서(李永瑞, ?∼1450)의 서문에 따르면, 이 시첩은 안평대군이 남송 때 영종(寧宗, 재위 1195∼1224)의 「소상팔경시(瀟湘八景詩)」를 얻은 것을 계기로, 영종의 시를 옮겨 적고 화공으로 하여금 「팔경도(八景圖)」를 그리게 한 다음 당시 문인들에게 시를 짓게 하여 완성한 것임을 알 수 있음. 현재 ‘팔경시’와 ‘팔경도’는 전하지 않음

 

 

각 시는 대부분 작자의 친필 글씨로서, 이들의 유묵(遺墨)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시의 문학 수준까지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술적, 문학적인 의의가 매우 높다. 더욱이 이 시첩에 글을 남긴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1417~1456) 등 사육신(死六臣)을 비롯해 많은 명사가 1426년(세조 2년)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함으로써 이들이 직접 쓴 글씨가 전하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도 희소가치가 크다.

 

중국 문물을 수용하되 독자성을 갖춘 우리 문화로 승화시켰다는 점, 왕실과 사대부 계층의 문화향유 양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는 점, 15세기 서예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 등으로 인해 오래전부터 많은 주목을 받아 온 작품이다. 조선 전기 명가들의 친필 유작을 모은 유일한 자료이자 전래 경위도 분명한 만큼 국보로 승격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다.

 

보물로 지정 예고되는 「남양주 불암사 목조관음보살좌상(南楊州 佛巖寺 木造觀音菩薩坐像)」은 17세기 전반기에 활발하게 활동한 조각승 무염(無染)을 비롯해 모두 5명의 조각승이 참여하여 1649년(인조 27년)에 완성한 불상이다.

 

높이 67cm의 단아한 규모에 머리에는 연꽃과 불꽃문양으로 장식된 화려한 보관(寶冠)을 썼으며, 가사는 두벌 겹쳐 입은(이중착의법) 모습에 상반신을 앞으로 구부렸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알맞고 신체의 자연스러운 양감이 돋보인다. 얼굴은 이마가 넓고 턱으로 내려가면서 좁아져 역삼각형을 이루었으나, 날렵하고 갸름하게 처리한 턱선, 높게 돌출된 코, 자비로운 인상에 실재감 있는 이목구비의 표현 등 1650년대를 전후로 아담하고 현실적인 조형미를 추구한 무염이 참여한 작품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17세기 대표 조각승 무염이 참여한 작품이자 정확한 제작 시기와 봉안처를 알 수 있고, 보존상태도 비교적 양호하여 17세기 중엽 불교 조각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서울 칠보사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七寶寺 木造釋迦如來坐像)」은 1622년(광해군 14년) 광해군의 부인인 문성군부인 유씨(장렬왕후 章烈王后)가 왕족들과 친정 부모의 천도를 목적으로 발원해 왕실 원찰(願刹)인 자수사(慈壽寺)와 인수사(仁壽寺)에 봉안한 11존(尊) 불상 중 하나로 추정되는 불상이다. 17세기 대표적 조각승 현진(玄眞)과 수연(守衍), 응원(應元), 인균(印均) 등 당대 유명 조각승들이 합작해 만든 작품으로, 조각승들의 제작 특징이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머리와 상반신을 앞으로 약간 숙인 자세에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고 왼손은 다리 위에 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모습이다. 상반신은 허리가 짧고 어깨가 넓지만 하반신은 다리가 높고, 턱을 수평으로 깎은 네모진 얼굴에 양 볼이 볼록하게 양감이 살아 있으며, 작고 가는 눈에 오뚝한 코, 미소가 있는 작은 입 등 단정하고 인자해 보이는 인상 등은 현진과 수연의 다른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이다.

*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왼손을 무릎에 얹고 오른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손 모양으로, 석가모니가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악마를 굴복시키고 깨달음에 이른 순간을 상징

 

기법이 화려하지 않고 비교적 간결하지만 중후한 기품과 위엄이 느껴지며, 17세기 전반 불상 중에서 수준 높은 작품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예술적 가치가 월등히 뛰어난 작품이다.

 

《이익태 지영록(李益泰 知瀛錄)》은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익태(1633~1704)가 1694년(숙종 20년)년 7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래 1696년(숙종 22년) 9월까지 재임기간 중의 업무와 행적, 제주 관련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서문에 따르면 이익태는 제주목사를 역임하면서 알게 된 제주도의 열악한 생활상과 누적된 폐단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참고하기를 바라며 기록으로 남겼다고 한다.

* 서명인 ‘지영록(知瀛錄)’에서의 ‘영(瀛)’은 ‘영주(瀛州)’를 의미하며 이는 제주의 옛 지명임

 

 

수록된 내용은 이익태가 제주목사로 부임하기까지의 여정, 재임기간 중의 공무수행, 제주도 부임시의 행적과 그 과정에서 지은 시ㆍ제문ㆍ기행문 등이며, 특히, 제주와 관련된 여러 기록물과 조선인을 포함하여 일본인, 중국인, 서양인 표류(漂流)에 관한 기록이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이 중 1687년(숙종 13) 제주도민 김대황(金大璜)이 출항 후 파도에 휩쓸려 베트남(安南)에 이르렀다가 귀국한 여정을 기록한 「김대황표해일록(金大璜漂海日錄)」은 조선 시대 베트남 관련 기록으로 희소성이 있다.

 

이 책은 제주도의 문화와 지명 등의 연원을 이해하는 데에 실질적이고 중요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고, 외국인의 표류 상황이 기록되어 있어 조선 시대 표류민 정책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높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보물 제652호로 지정된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의 《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 (1704년)보다 8년이나 빠른 것으로, 연대가 가장 앞서는 제주도 최초의 인문지리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또한, 이번에 새롭게 보물로 지정예고되는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慶州 皇吾洞 金製耳飾)」는 1949년 경주 황오동 52호분에서 출토된 귀걸이 한 쌍으로, 외형상 주고리[主環], 중간장식, 마감장식의 삼단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신라 시대 5~6세기에 해당하는 유물이다. 접합 부위가 매우 세밀해 육안으로 잘 확인되지 않을 만큼 세공 기술이 뛰어나고 작은 구슬 장식도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다. 나아가 입체형인 펜촉형 장식물 안팎으로 작은 금알갱이를 촘촘하게 부착해 시각적인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이 귀걸이는 신라 시대 경주에서 만든 전형적인 귀걸이 형태라는 점, 제작기법과 조형성이 우수하고 펜촉형 장식물의 창의적인 형태와 입체감이 돋보이는 점 등에서 신라 고분 금속공예품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며, 신라 장신구의 발전과 변화를 고찰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한편, 보물 제455호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慶州 皇吾洞 金製耳飾)」는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로 이름을 바꾸기로 하였다. 이번 이름 바꾸기 예고는 보물 제455호가 1966년 일본에서 환수된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임에도 불구하고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로 인식되어 온 것에 대해 바로잡는 조치이다. 참고로,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는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와 더불어 신라 시대 장신구의 대표적 사례로 알려진 작품이다.

 

문화재청은 《봉사조선창화시권》과 《이익태 지영록》, 「보물 제455호 이름 바꿈」 등 7건에 대해 30일 예고 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ㆍ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국보ㆍ보물)로 지정하고 이름 바꾸기도 진행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