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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 / 극진한 효도인가, 가족 이기주의의 발현인가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는 남의 땅에 몰래 묻기도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談) 9월호 펴내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추석을 앞두고 다시 되짚어 보는

‘명당’을 둘러싼 조선시대 선현들의 ‘가문’ 이야기

 

한국국학진흥원(원장대행 김상준)은 지난 1일, ‘명당’을 소재로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談) 9월호를 펴냈다. ‘명당’에 대한 집착은 조선시대부터 시작되었지만, 21세기 인터넷 세상을 맞이하고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주요 후보들의 조상 묘에 대한 특집 보도들이 줄을 잇는 만큼 명당자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하다. 한가위를 앞두고 개봉 예정인 ‘영화 명당’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 때, 조선시대 명당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들을 살펴보았다.

 

도읍지ㆍ절터ㆍ집터를 정하는 양택풍수 중심에서

조선 후기, 조상의 좋은 묏자리를 찾는 음택풍수로 변화

 

‘명당’의 기본이 되는 ‘풍수지리’는 본래 도읍지를 정하거나, 절터나 집터를 잡는 양택(陽宅)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새 도읍지로 삼고 천도한 근거 역시 풍수지리에 있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를수록 조상의 묏자리를 찾는 ‘음택(陰宅)’풍수의 수요가 늘어났다.

 

조상의 주검이 묻힐 묏자리를 찾고, 묘를 관리하는 것은 조상의 영혼을 모셔와 섬기는 제사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졌다. 따라서 좋은 묏자리 곧 명당을 확보하려는 욕구가 높아지게 되었다. 좋은 묏자리에 조상의 주검을 모시고, 잘 관리하는 일은 곧 자손의 도리를 지키고 가문의 권위와 위상이 걸려 있는 문제였으며, 어떤 묏자리를 쓰느냐에 따라 가문의 운명이 달라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좋은 묏자리를 잡는 것은 가문의 미래를 위한 길

칠순의 아버지가 지관을 불러 아들의 묏자리를 잡기도

 

조선시대 좋은 묏자리를 잡는 일은 집안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아버지가 아들들의 묏자리를 미리 잡아주는 일도 있었다. 경상북도 안동의 김택룡(金澤龍, 1547∼1627)이 남긴 ‘조성당일기’에 따르면 김택룡은 71살의 나이였던 1617년(광해군 9) 3월 11일 지관인 이자정을 초대하였고 이틀 후 아들들과 함께 좋은 묏자리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지관(地官)이란 풍수지리설에 따라 묏자리나 집터의 길흉을 판단하는 사람으로 지사(地師) 또는 풍수라고도 하였다. 미리 점찍어둔 여러 장소를 보여주고 이에 대해 지관의 의견을 들으며, 신중하게 아들의 묏자리를 결정하였다.

 

 

명당에 조상의 무덤을 쓰려는 욕심에

남의 땅에 몰래 시신을 묻는 ‘투장(偸葬)’까지 감행

 

과학적으로 볼 때 좋은 묏자리를 쓰는 일이란 땅에 묻힌 조상의 주검이 자연으로 잘 돌아갈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찾아내는 일이지만, 여기에 가문의 미래라는 의미가 부여되자 조선후기에는 묘지를 둘러싼 갈등과 분쟁이 덩달아 많아졌다. 대부분 국유지였던 임야는 좋은 명당을 찾아 묘지를 쓰게 되면서 급속도로 사유화되었다. 사유지가 되어 버린 좋은 명당에 조상의 무덤을 쓰고 싶은 욕망은 급기야 남의 땅에 몰래 시신을 묻는 ‘투장(偸葬)’을 감행하는 데에 이르렀다.

 

남의 땅에 몰래 장사를 지내는 투장은 그 긴박함이나 비밀스러움으로 인해 투장 당시 봉분까지 올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런 까닭에 투장의 묘수 중의 하나는 원래의 무덤이 옮겨 가면서 파놓은 자리를 쓰는 것이었다. 힘들여 땅을 팔 필요가 없었기에 투장 하는 사람들은 손쉽게 무덤을 쓸 수 있었다. 일단 거칠게나마 흙을 덮어두기만 하면 땅주인이라고 해도 함부로 무덤을 파헤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갈등 속에 묏자리를 둘러싼 법정분쟁이 빈번하였는데, 이를 산송(山訟)이라고 한다. 땅주인들은 관청을 찾아가 억울한 입장을 호소하고 소송을 걸게 되지만, 민사사건인 산송에 대한 관청의 판결은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였다. 다시 이장해가라는 판결을 받는다고 해도, 관청에서는 이장을 집행하도록 하는 강제력을 발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투장한 집안이 권력을 이용하여 버티는 사례도 허다하였다. 산송은 특정 집안 사이에 길게는 백 년, 이백 년이 넘도록 지루하게 계속되기도 하였고, 관아와 지역사족 간의 힘겨루기 장면도 제법 펼쳐져 이를 ‘향쟁(鄕爭)’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조선후기 가문들의 명당, 투장, 그리고 산송 이야기

선현들의 일기류에서 새로운 창작소재 발굴

 

한국국학진흥원에서 2011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스토리테마파크(http://story.ugyo.net)에는 조선시대 일기류 244권을 기반으로 4,270건의 창작소재가 구축되어 있으며, 검색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매월 한 가지의 주제를 선정하여 웹진 담(談)을 발행하고 있는데, 전통적인 일기류를 소재로 하지만 주제의 선정은 지금의 일상과 늘 맞닿아 있다.

 

이번 달 편집장을 맡은 천준아 작가는 9월엔 민족의 명절, 한가위가 있기에 ‘묏자리’를 주제로 정하였다고 밝혔다. 비록 매장에서 화장으로 장례문화가 바뀌면서 명당에 대한 현대인의 관심은 줄어들고 있지만, 우리 마음속의 명당은 한가위를 맞이하여 가족들이 함께 모인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해마다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명절에 도리어 후손들에게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데, 이번 한가위에는 조상에게 차례를 드리기 위해 모인 그곳이 가족 간의 화목함을 나누고 서로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새로운 명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선현들의 일기 속에 조선후기 가문들의 명당, 투장, 그리고 산송을 둘러싼 창작소재들을 기반으로 새로운 역사 콘텐츠가 창작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조선시대 일기 속 명당 이야기

 

❚ 명당을 찾아서, 묏자리 쟁탈

명당을 지켜라! - 묏자리 쟁탈전으로 인한 산송 사건 (배경이야기 : 조선시대 묘자리 분쟁)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7-24 ~ 1616-09-20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CEJ_0054

 

박가와 정가의 묏자리 쟁탈전, 판결 후에도 계속되다 (배경이야기 : 조선시대 풍수지리와 묘를 둘러싼 소송)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9-22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CEJ_0058

박가와 정가의 묏자리 쟁탈전 - 마침내 타협점을 찾다 (배경이야기 : 조선시대 산송문제)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9-25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CEJ_0062

 

❚ 투장

투장자를 잡는데 수령은 늦장부리다 (배경이야기 : 투장과 명당)

권상일, 청대일기, 1721-02-01 ~ 1721-02-10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PB_3059

 

투장한 무덤을 파서 옮기게 하다 (배경이야기 : 투장 소송과 처리)

권상일, 청대일기, 1739-08-05 ~ 1739-08-19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PB_4027

 

관찰사가 투장 문제를 해결하다 (배경이야기 : 산송의 해결과 지방관)

권상일, 청대일기, 1721-03-23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PB_30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