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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임시정부의 또 다른 이름 김철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 -김성찬-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백년편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글 형식의 글입니다.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 접수를 받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문의 : 02 -733-5027】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글로써 선생님을 만나 뵙습니다.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연락할 수 있는 21세기에서 장문의 편지를 쓴다는 것은 너무나 어색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을 만나고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오랜만에 편지를 써보게 됩니다. 제 소개가 많이 늦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청년 김성찬입니다. 제가 선생님께 직접 편지를 쓰게 된 것은 얼마전 8월 15일 광복절을 얼마 앞두고 우연히 뉴스를 보았습니다.

 

 

바로 선생님에 대한 뉴스였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핵심 인사인 선생님의 생가가 제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거리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에 곧장 선생님의 생가를 직접 다녀왔습니다. 선생님 생가가 위치한 함평군 신광면 구봉마을에는 선생님을 모셔놓은 사당과 기념관 그리고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청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건물이 있었습니다. 특히 선생님과 임시정부청사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선생님의 생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기념관을 돌아다니면서 선생님에 대한 이력과 활동내역들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뒤 집안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상해로 망명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임시정부 수립 전후 선생님의 활약상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남부럽지 않은 학력과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지만 선생님께서는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자기희생과 모범을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일강 김철 선생  무엇보다도 저는 여기에서는 임시정부와 관련된 선생님의 각별했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상해임시정부청사의 건물을 마련하는데 선생님의 노력이 컸다는 것입니다. 함평에서 모든 재산을 처분하시고 그것을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사용하시고, 심지어 선생님의 명의로 상해임시정부의 건물이 마련되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자세히 알지 못했던 이야기였습니다.

 

그 건물에 깃든 역사적인 사실을 비로소 이곳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임시정부와 선생님의 각별한 이야기는 항저우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일제의 추격 속에서 존폐의 위기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리고 힘들게 이동한 항저우에서 임시정부는 선생님의 작은 여관방에 자리를 마련하여 그 이름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제가 있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부인 김정자 여사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도 돌이켜보면 누구나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결단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떠나면서 선생님은 부인에게 한 통의 편지를 남기셨습니다. 그 편지 속에서 선생님은 “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 한 몸을 기꺼이 조국에 바쳤으니 더 이상 찾지도 기다리지도 말고 부인께서는 앞날을 알아서 처신하시오.”라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이후 여사님은 선생님의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가족 걱정을 버리고 운동에 매진하도록 소나무 아래에서 순절하셨습니다. 90년 전 그 단심송(丹心松)은 여전히 선생님의 마을 지키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활약만큼이나 여사님의 결단은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그토록 요원하시던 조국의 독립은 보지 못한 채 1934년 48세의 나이로 눈을 감으셨습니다. 영양실조와 과로로 인한 급성폐렴. 남부럽지 않은 학력과 많은 재산으로 그 시대에 호의호식할 수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오직 조국독립의 길에 앞장 선 선생님께 찾아온 병마와 죽음은 안타깝고 애통합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11년 뒤 조국은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방된 땅에 선생님께서는 한줌의 흙으로 고향 땅에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선생님의 모습은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이 새겨진 기념관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좋은 방책과 급무는 죽거나 살거나 모두가 합하여 하나가 될 일이다.”

  1920년 의용단을 조직할 때 선생님께서 취지서에서 밝힌 말씀입니다. 조국 독립을 위한 선생님은 하나가 될 것을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선생님의 말씀은 남북으로 분단된 이 현실 속에서도 아직 유효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바라신 조국은 분명히 분단된 한반도가 아니라 완전한 대한의 독립을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모습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둘로 나눠져버린 상황입니다. 앞으로 선생님의 독립정신을 깊이 새기고 우리 세대에서 이루지 못한 통일을 통해서 독립운동의 완성을 이어 나가겠습니다.

 

  아무쪼록 선생님 잘 계십시오. 선생님의 그 뜻과 노력 잊지 않고 꼭 기억하고 나누겠습니다. 바로 이곳 대한민국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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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찬

 

 전남대학교 사학과/교육대학원 역사교육과 졸업,

 독립정신답사단 14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