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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가을의 길목에서 만나는 금강산 화암사(禾巖寺)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원도 고성에 있는 화암사(禾巖寺)는 신라 혜공왕때인 769년 창건한 절이다. 신라후기 고승이었던 진표율사는 김제 금산사를 중창한 스님으로 변산 부사의 방에 들어 깊은 수련을 하였고, 이때 지장보살과 미륵보살로부터 법을 전해받고 산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진표는 대연진()에서 용왕으로부터 옥과 가사를 받고, 용왕의 권속들이 도와 당시 큰 연못이었던 곳을 메워 금산사를 크게 중창하였다고 한다.

 

진표율사는 금산사에 머물며 해마다 개단법회(점찰법회)를 통하여 중생교화를 하였으며, 이후 금산사를 떠나 속리산 법주사를 중창하고, 다시 강원도로 가 금깅신 발연사와 화암사를 개창하였다. 진표율사는 금강산으로 와서도 금산사에서 시행했던 점찰법회를 열어, 흉년에 굶주리던 많은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진표율사는 금강산 발연사 동쪽 큰 바위 위에 앉아 깊은 선정에 들었다가 좌탈입망하였으며, 제자들은 스승의 선정에 든 모습을 그대로 두고 매일같이 공양을 올렸다. 이후 살이 다 썩어지고난 뒤 그의 해골은 바위에서 무너져 떨어지게 된 뒤에서야 제자들이 뼈를 모아 흙을 덮어 진표유율사의 무덤이 되었다.

 

이렇게 신라말 진표율사가 창건한 화암사는 금강산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설악산과 바로 만나 있다. 진표율사가 창건한 후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고 있지 않아 아쉽기 그지 없으며, 조선 중기에 들어 1623년 인조원년 화재로 소실된 후 1625년 다시 중창하였다. 1864년 고종원년에는 본래 있던 곳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서 중창하였으며, 수바위 아래에 세웠다고 하여 바위의 이름을 따서 수암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런데 바위의 모양이 벼(禾)의 낱알과 같아보인다하여, 1912년 화암사(禾巖寺)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이후 한민족의 수난과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고 다시 중건되는 고난의 역사를 함께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근래 화암사가 그나마 현재의 모습으로 자리하게 된 계기는 1991년 세계잼버리대회를 앞두고, 세계의 청소년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알려주고자 주변을 정비하고 일주문, 대웅전, 요사채 등을 새롭게 건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불교국가에서 온 많은 청소년들에게 수계식과 함께 청소년 수련장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은 까닭이다.

 

화암사는 본래 금강산 건봉사의 말사였으나, 지금은 신흥사의 말사로 강원도 내 고찰의 면모를 갖춘 절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었으며, 근래는 템플스테이를 운영하여 불교를 알고자하는 국내외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사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화암사에는 조선시대 후기 문예부흥을 꿈꾸던 정조가 하사한 관음상을 비롯한 병풍 등 귀한 보물과, 창건주인 진표율사의 진영을 비롯한 16고승의 진영도 있었으나,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는 화암사에서 살다가신 고승들의 승탑 15기가 절의 입구에 남아있어, 화암사의 역사를 대신하고 있다.

 

최근 화암사는 옛 영화를 바탕으로 화암사 동쪽 산기슭 동해가 바라보이는 곳에 미래세계의 부처인 미륵불을 조성하여 한민족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기도를 시작하였다.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