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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대한독립에 온몸 바친 백범을 사랑합니다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03]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암살당하였지요? 안두희가 입을 열지 않고 저 세상으로 가 아쉽게도 암살의 배후는 끝내 미궁으로 남아있고요. 그런데 백범은 그 이전에도 암살범의 총에 맞았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적이 있습니다. 바로 1938년 5월 6일의 일이지요. 당시 3당(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이 호남성 장사의 남목청에 모여 3당의 통일 문제를 논의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운환이 백범을 저격하였습니다.

 

백범이 총에 맞아 의식불명의 상태로 상아의원에 도착했을 때, 의사는 백범의 상태를 보고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백범을 입원시키지도 않고 문간에 방치해놓았는데, 세 시간이 넘도록 백범의 숨이 붙어있자 그때서야 부랴부랴 치료에 들어갑니다. 그때는 이미 백범이 숨이 넘어갔다고 알려져 백범의 맏아들 김인이 홍콩에서 전보를 받고 아버지 장례를 치르려고 장사로 달려오고 있을 때였지요.

 

뒤늦은 수술 끝에 백범은 살아납니다. 아직 민족을 위해 할 일이 많은 백범을 하느님께서는 다시 돌려보내신 모양입니다. 당시 같이 저격당한 현익철, 유동열, 지청천 중 현익철은 끝내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백범은 살아났지만 총탄은 빼내지 못했지요. 총알은 심장 부근에 박혀 있다가 대혈관을 통해 오른쪽 갈비뼈 옆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리하여 백범은 목숨은 건졌지만 총격의 후유증으로 수전증을 얻게 됩니다. 백범이 남긴 많은 붓글씨를 보면 약간의 떨림이 있는데, 이게 다 총격의 후유증인 수전증 때문이지요. 그래서 백범 글씨체를 떨림체라고도 하고 총알체라고도 한다는군요.

 

그나저나 이운환은 왜 백범을 저격한 것일까요?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경비사령부는 이운환을 체포하고, 그 외 강창제, 박창세를 체포합니다. 이들을 혁명난류(革命亂類)라고 하는데, 혁명난류란 혁명의 본류를 벗어나 함부로 행동하는 불평불만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는 일본과의 전쟁 중이라 중국 법정은 연루자 대부분을 석방하고 주범 이운환만 사형 선고를 합니다. 그렇지만 이운환도 탈옥을 해버려 끝내 범행동기와 배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네요.

 

백범은 이밖에도 늘 암살의 위험 속에 살았습니다. 이봉창과 윤봉길 지사의 의거를 배후에서 지시한 백범의 목에는 거액의 현상금(60만원)이 붙어 있고, 일제가 눈에 불을 켜고 백범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슬아슬하게 체포 위기를 넘긴 때도 있었습니다. ‘박 대장’이라 불린 전차검표원 청년의 혼인식에 초청받았을 때입니다. 백범은 위험을 무릅쓰고 혼인식에 참석하였고, 도착하자마자 급하게 냉면 한 그릇을 비우고 이웃가게로 옮깁니다.

 

 

온 김에 이웃에 동포가 운영하는 가게에 인사나 하고 가려던 것이었지요. 그런데 정보를 접한 일경이 박 대장 집을 덮칩니다. 백범은 일경이 박대장 집을 덮치는 것을 보고 급히 가게를 빠져나가지요. 만약 혼인식에서 냉면이 아니라 뜨거운 국수가 나왔다면 백범의 식사 시간은 길어졌을 것이고 그러면 현장을 덮친 일경에 의하여 상해의 동포들은 더 이상 백범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백범을 암살하려 한 사람 가운데는 백범의 인품에 감화되어 백범에게 자백한 사람도 있습니다. 한 번은 임정청사로 한 청년이 찾아와 백범 앞에 권총 한 자루와 수첩 하나를 내놓습니다. 청년 얘기로는 일본 영사관에서 백범을 살해하면 먹고살만한 큰돈을 줄 뿐만 아니라 본국의 가족들에게 국유지를 농지로 내주겠다고 하였답니다.

 

그러면서 일본 관리는 한편으로 말을 안 들으면 불령선인으로 엮어버리겠다고 하였다나요. 그래서 할 수없이 권총을 받긴 했지만, 백범을 지켜보며 자괴감을 금할 수 없었답니다. 그리하여 백범에게 권총을 주며, 이 총으로 왜놈들을 죽여달라고 하면서, 자신은 남태평양으로 떠난다고 하였답니다.

 

그리고 백범이 윤봉길 의사 의거 뒤 일본 영사관이 발칵 뒤집혀졌을 때 당시 상해 YMCA 간사였던 피치(George A. Fitch) 박사댁에 은신할 때였습니다. 그렇지만 이곳도 정탐꾼에 발각되어 백범은 급히 이곳을 빠져나갑니다. 이때 운전대는 피치 박사가 잡고 백범은 뒷좌석에서 피치 부인과 나란히 앉아 부부 행세를 하면서 빠져나왔다는군요.

 

이후 백범은 중국인 저보성의 도움으로 절강성 가흥 수륜사창으로 피신하였다가, 이곳도 안전치 않아 중국 처녀뱃사공 주애보와 부부로 가장하면서 선상(船上) 생활을 합니다. 백범은 백범일지에서 자세히 얘기하지 않지만, 아마 부부로 위장하여 살다가 어느 순간 실제 부부로서 생활을 한 것 같습니다. 그 때 두 남녀의 로맨스에 대해서는 중국작가 하련생이 ㆍ《선월(船月)》이라는 소설로 그려냈지요.

 

그런데 백범의 목에 붙은 현상금이 60만원이라고 하니 감이 잘 안 잡히지요? 현상금 60만원이면 당시 임시정부 청사 임대료 1,600년치를 내고도 남을 돈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왜놈들도 이런 거액을 내걸었겠습니까? 그런데 백범일지를 보면 백범은 자신의 목에 현상금 60만원이 붙자, 임정의 비밀요원으로 하여금 자신을 밀고하게 한 다음 현상금을 타내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해봤다고 합니다. 자나 깨나 오직 대한독립만을 꿈 꾼 백범만이 할 수 있는 상상이네요.

 

백범일지를 읽다보면 ‘어떻게 한 인간이 한 번도 아니고 그렇게 수많은 고초를 겪고 죽을 고비를 넘기는 영화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고 오로지 대한독립이라는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하는 감탄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백범을 다시금 경외의 눈빛으로 보게 됩니다.

 

 

보통 우리 민족 독립의 두 거두를 들라면 백범 김구와 우남 이승만을 듭니다. 그렇지만 미국에서 편하게 외교운동을 펼친 우남과 백범을 같은 평면에서 견줄 수는 없지요. 물론 우남도 1899년 고종 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5년 7개월간 감옥생활을 하지만, 적어도 일신의 안일함에 있어서는 숱한 죽을 고비를 넘긴 백범과는 견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범은 자신의 영달과 명예 등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조국의 독립만을 생각한 순정파 남아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광복 후 남북이 갈리자 현실 정세가 어떻든 오로지 하나 된 조국이 되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38선을 넘었던 것이지요.

 

이에 대해 우남은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자신의 영예와 이익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친구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건너가서도 박용만을 밀어내고 하와이 한인회를 지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금을 사적 이익에 사용하고,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와서는 자신의 집권을 위해 친일파와도 손을 잡은 것이지요.

 

그렇지만 그런 개인의 순수함을 떠나서 거시적으로 본다면 우남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미국에서 외교운동을 벌이며 국제정세의 흐름에 눈 뜬 우남은 현실적으로 남북이 합쳐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남한 단독선거라는 현실론으로 간 것이겠지요.

 

그리고 사람마다 다 생각이 다르겠고, 또 우남이 독재정치의 아주 나쁜 유산을 남겼지만, 어쨌든 남한이 공산주의로 넘어가지 않고 자유대한민국으로 오늘날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우남이 기초를 놓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남이 독재정치의 나쁜 유산을 남겼고, 친일파와 손잡은 것은 두고두고 마음에 거슬립니다. 그래서 저는 우남보다는 자기 온 몸을 바쳐 순수한 정신으로 대한독립을 위해 힘쓴 백범이 더 좋습니다. 백범 김구! 당신을 존경합니다. 아니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