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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만세운동 100돌에 만나는 여성독립운동가 100인

블라디보스톡서 찾은 '서울스카야 2A'와 이인순 지사

신한촌 선열들 추모비에 국화 한 다발을 바치다

[우리문화신문= 블라디보스톡 이윤옥 기자]

 

혹한의 땅 만주벌서 떠는

동포의 어린 영혼들 보듬으며

겨레 혼 심어주던 임

 

살 에이는 시베리아 시린 추위

견뎌내라 다독이던 임

 

어이타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이국땅서 숨져갔나요

 

블라디보스톡 한인촌에

혜성처럼 나타나 여장부의 푸른 꿈

내보이다가 활짝 펴지 못하고 떠나던 날

 

푸르던 하늘도 구슬퍼

핏빛 비를 뿌리었다네       - 이윤옥 ‘블라디보스톡 한인촌 여장부’-

 

핏빛 비를 뿌리던 하늘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푸르렀다. 가슴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 아래, 신한촌 집터를 걸으며 나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이인순 지사의 삶의 흔적을 찾아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을 찾은 것은 어제(24일) 저녁 5시 무렵이었다. 아무르바닷물이 회색빛을 띄던 그 시각 신한촌도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신한촌은 1911년 무렵부터 형성된 곳으로 많을 때는 1만명 이상의 한인들이 살던 곳이다. 이곳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나 1937년 한인 강제이주가 시작된 이후 폐허로 변했다. 그 뒤 아파트촌이 들어서서 현재는 당시 한인들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변모해버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파트촌 한 구석에 '서울스카야 2A'라는 번지를 적은 문패가 남아있어 이곳이 과거 한인들의 집단거주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서울스카야 2A'라는 문패가 달려 있는 이 집은 아무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무르스카야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집으로부터 하바롭스카야 거리 끝의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이 설치되어 있는 곳까지가 신한촌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은 1919년 박은식 선생이 3.1만세운동 때 함께 한 곳이기도 하다. 1909년 블라디보스톡 지도에 표기된 '한국거리(까레이쓰까야 울리짜)'를 통해 현재 지역이 신한촌이라는 것을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고대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했던 흔적을 남긴 일본 가나가와현 오이소 지방에서 만난 고마쵸(高麗町) 문패를 보는 듯 가슴이 뭉클했다. 문패가 없다고해서 역사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서울거리’라는 작은 문패 하나가 주는 그 정겨움은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를 만난 듯 뭉클한 감동 그 자체였다.

 

이인순 (李仁橓, 1893 ~ 1919. 11.) 지사는 동생 이의순 (1895. ~ 1945. 5. 8)지사와 함께 독립운동에 뛰어든 자매로 이들은 정부로부터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과 애족장을 나란히 추서받았다. 이인순 지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선생(1873. 6. 20. ~ 1935. 1. 31.)의 맏딸로 1902년 아버지가 고향인 함경남도 단천에서 경기도 강화의 진위대장으로 활동하게 되자 할아버지 이발 (李發), 동생 의순 등과 함께 서울로 이사와 자랐다.

 

 

이인순 지사의 아버지 이동휘 선생은 함경남도 단천 출신으로 1907년 강화도에서 의병 투쟁을 모의했으며, 1908년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창립하고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105인 사건으로 함경도에서 잡혀 3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그 뒤 1912년 북간도로 망명한 이후 광성학교(光成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했으며 1913년부터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을 중심으로 조직된 권업회(勸業會)에 참가하여 이상설·이갑·신채호·정재관 등과 함께 민족해방투쟁을 위해 적극적으로 뛰었다. 이동휘 선생은 1935년 1월 31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62살로 숨질 때 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국민대표회 집행위원 등을 맡으며 상해와 연해주를 주 무대로 독립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폈다.

 

한편 이인순 지사는 한성 연동정신학교(漢城連洞貞信學校)를 졸업한 뒤 17살의 나이로 함흥, 성진에서 교사로 활동하다가 아버지가 북간도로 망명길에 오르자 함께 이인순 지사도 중국으로 건너갔다.

 

 

아버지가 연길  국자가(局子街) 소영자(小營子)에서 광성학교를 세워 교육 활동을 할때 이인순 지사도 국자가의 조선여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이인순 지사는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높이는 교육을 실천했으며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여성들의 의식 향상을 위해 힘썼다. 1918년 가을, 가족들이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 정착하게 되자, 이인순 지사 역시 남편 정창빈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였다.

 

낯선 땅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인순 지사는 이곳에서 독립운동하는 아버지를 경제적으로 돕고자 작은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의 나이 27살 때 일이다. 그러나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그해 11월 유행하던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앞으로 아버지를 도와 독립의 선봉장이 될 인텔리 여성이 열악한 환경에서 병마를 만나 꿈을 접어야 했으니 이 보다 더 큰 불행한 일도 없을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이인순 지사가 숨지고 나자 5살 난 아들 정광우마저 장티푸스로 숨진 사실이다. 그러나 더 큰 불행은 이 들 두 모자의 죽음을 지켜보던 남편 정창빈 지사가 이를 비관하여 모자가 숨진 이듬해인 1920년 1월 27일 음독자살하였으니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숨진 이인순 지사의 남편 정창빈 지사는 8살 때 손가락을 잘라 어머니를 구한 효자로 알려진 인물이며, 1907년 계봉우의 추천으로 신민회에 가입하여 이동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911년 1월, 북간도로 망명하여 계림촌(鷄林村)에서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이어 1916년 12월에는 러시아 연해주 도비허에 있는 화동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재러동포 자녀들의 민족의식 교육을 담당하였다. (1995년 대통령표창 추서)

 

한편, 27살로 요절한 이인순 지사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동포사회에서는 1920년 1월 17일 낮 2시 주 상해(駐上海) 대한애국부인회 주최로 작고한 이인순과 하란사(김란사)ㆍ김경희 등의 추도식을 열었다. 이 때 내빈으로 참석한 이는 안창호ㆍ김립ㆍ윤현진 등 상 해 인사 30여 명이었다. 러시아 땅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숨진 이인순 지사를 상해에서 추도식을 열 정도로 이인순 지사는 동포 사회에서 이름난 여성독립운동가였다.

 

 

깊어가는 가을, 낙엽이 쌓인 신한촌 거리를 걸으며 99년 전, 이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푸른 꿈을 펼치다가 27살의 나이로 숨진 이인순 지사를 그려보았다. 이인순 지사의 발자취를 찾아 몇 해 전 중국 연길의 국자가(局子街) 소영자(小營子)에서 느꼈던 그 감회는 블라디보스톡 한인촌으로 이어졌다. 사람은 갔어도 그가 밟았던 땅은 영원히 그 자리에 있는 법, 3ㆍ1만세운동 100돌을 앞둔 지금, 이인순 지사를 포함한 블라디보스톡 한인촌에서 독립의 불씨를 활활 지피던 선열들의 추모비 앞에서 국화 한 다발을 바치며 나는 다짐했다.

 

 

결코 그대들의 굽힐 줄 모르던 삶의 용기와 광복에의 뜨거운 열정을 잊지 않겠노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