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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210년 만에 다시 만난 신현의 시권과 하사품 《맹자》

수장고 속 왕실유물 이야기 11월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우리는 살아가면서 아끼던 물건들을 종종 잃어버리곤 합니다. 그리고 그 물건을 먼 훗날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다시 만나곤 하지요. 이번 시간에는 과거에 흩어졌던 두 기록물의 우연한 재회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소장가치가 있는 유물을 구입하고 있습니다. 구입한 유물은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등록되어 전시, 조사 등에 활용됩니다. 그런데 간혹 깊은 관계가 있는 몇 몇 유물들이 서로 다른 때에 들어온 경우가 있습니다.

 

먼저 살펴볼 소장품은 조선시대 과거 시험지인 ‘시권(試券)’입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다양한 시권을 소장하고 있는데, 2014년에는 화려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시권을 입수하였습니다.

 

아래의 시험지는 순조대에 시행한 응제(應製) 시험에 신현(申絢, 1764-1827)이라는 인물이 작성하고 임금이 직접 채점한 시험 답안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정규적인 시험 외에 임금의 특명으로 ‘응제(應製)’라는 과거 시험을 시행했는데, 특히, 정조대부터는 임금이 직접 시험지를 채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험지는 오른쪽 상단의 ‘어고[御考: 임금이 직접 시험지를 채점함]’ 라는 글이 쓰인 노란 색지가 먼저 눈에 확연히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아래는 시험 문제가, 두 번째 줄부터는 응시자의 답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채점자[순조]는 답안을 읽고 난 뒤, 빨간 색으로 중요한 부분들에 점을 찍고 큰 글씨로 채점하였습니다.

 

 

노란 색지 아래에는 한 줄로 《소학(小學)》의 한 구절인 ‘산에 가서 땔나무하고, 물에 가서 고기를 잡아, 부엌에 들어가 맛있는 음식 장만하고, 마루에 올라가 문안드린다[或山而樵 或水而漁 入廚具甘旨 上堂問起居]’라는 글제가 제시되었고, 그 아래에는 응시자가 작성해야 할 문체인 ‘설(說)’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험지 오른쪽 아래에는 응시자가 관직과 이름인 ‘右副承旨 申絢 製進[우부승지 신현이 지어서 올림]’을 쓰고 종이를 세로로 잘라 돌돌 말아서 종이끈으로 묶고 그 위에 ‘臣謹封[신하가 삼가 봉합니다]’이라고 써놓았습니다.

 

그 옆에는 작은 글씨로 ‘丁卯八月十五日應製[1807년 8월 15일에 시험에 응하다]’와 ‘賜孟子[맹자를 하사하다]’를 써두었습니다. 시험의 결과는 보통 9등급 또는 12등급으로 나뉘는데, 이 답안지의 주인인 신현은 일상(一上)・중・하, 이상(二上)・중・하, 삼상(三上)・중・하, 차상(次上)・중・하의 등급 중 ‘三下’라는 성적을 받았습니다. 곧 12등급 중에서 9등급을 맞은 셈입니다.

 

이 시험지에는 여러모로 재미있는 특징들이 보입니다. 흰 바탕 위의 노란 색지와 붉은 먹이 자아내는 색감, 임금이 채점한 흔적, 이름을 가리기 위해 종이를 말아서 끈으로 묶은 것 하나하나가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흔히 생각하던 관직 진출을 위한 유생의 시험지가 아닌 관리들의 시험지인 점도 새롭습니다. 그런데 이 흥미로운 기록물은 또 다른 유물과 만났을 때, 그 가치가 더욱 빛납니다.

 

다음 소장품은 2017년에 입수한 《맹자집주대전(孟子集註大全)》으로 1807년에 임금이 신하에게 내려준 책입니다. 이 책에는 임금이 언제 어떠한 이유로 신하에게 책을 내려주었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첫째 면에는 임금의 하사품임을 상징하는 도장인 ‘규장지보(奎章之寶)’가 있습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 두 소장품이 지닌 단서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면 당시 상황을 조금 더 상세히 알 수 있습니다. 순조 8년(1807) 8월 15일에는 승사(承史: 승지承旨와 주서注書)들만을 대상으로 《소학》의 한 구절을 주고 설(說)이라는 문체로 글을 짓게 하는 시험이 있었습니다. 《승정원일기》에 보이는 당시 승사는 10명으로, 아주 소수만을 대상으로 시험이 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험은 임금이 친히 점수를 매겼고, 신현은 삼하(三下)라는 성적을 받아 그 부상으로 《맹자》를 받게 된 것이죠. 이 두 소장품은 원래 신현의 집에 있었을 것이고, 임금이 친히 채점한 시험지와 그의 부상으로 받은 책인 《맹자》는 보물로 귀하게 보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 두 기록물들은 세상에 흩어지게 되었고 오랜 시간이 지나 마침내 시험지는 2014년에, 책은 2017년에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다시금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글을 보았을 때, 많은 분들은 이미 눈치 채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바로 이 책은 신현이 친 시험의 결과로 임금이 내려준 상입니다. 시험지 하단에 작은 글씨로 기록된 ‘賜孟子[맹자를 하사하다]’라는 문구는 바로 이 책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박물관에서는 소장품의 확충을 위해서 매년 유물을 구입하고 있습니다. 이 업무가 주는 큰 보람은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유물 사이에서 학예사가 그 유물들과 교감할 때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으로 유물들은 다시 본연의 가치를 되찾고 박물관의 소중한 소장품으로 자리매김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상백(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