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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대한문이 된 덕수궁의 정문 대안문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95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대한문(大漢門)은 고종이 새로 건축한 덕수궁의 정문이니 이름을 처음에는 대안문(大安門)으로 하얏다가 대안이란 안(安)자가 계집녀 자에 갓씨운 글자이고 그 대궐 짓자 양장하고 모자 쓴 녀자 배정자의 출입이 빈번하야 상서롭지 못하다는 말쟁이의 말로 인연하야 대한문으로 고치엇다. 이 문이야 말이지 여러 대궐문중에 제일 나어리고 팔자 사나운 문이다. 이 문이 비린 바람 피부속에서 건축하기 시작하얏스니 말하자면 나흘대부터 병신으로 생긴셈이다. 준공되며부터 조선의 국운은 점점 서산에 떨어지려는 해와 가트며 벌별 무서운 꼴 우수운 꼴을 꼴을 다보고 격것다.”

 

 

이는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 제65호(1933년 07월 01일 발행)에 실린 “팔자(八字) 곳친 경성시내(京城市內), 육대문(六大門) 신세타령(身勢打鈴)”이란 제목의 기사입니다. 대한문은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덕수궁의 정문(正門)을 이르는데 원래의 이름은 대안문이었습니다. 1899년 3월부터 1906년 4월 25일까지는 가로 347㎝, 세로 124㎝ 크기의 “大安門”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지요. 대한제국 시기에 대신을 지낸 민병석이 '크게 편안하다'는 의미로 썼다고 합니다. 이 '대안문(大安門)'은 '대한문(大漢門)'으로 바뀌었으나 누가, 어떤 까닭으로 바꿨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만 있을 뿐 정설이 없고 별건곤의 예기도 가설일 뿐입니다.

 

“김향화를 비롯한 수원기생들은 고종 임금이 돌아가셨을 때도 나라 잃은 설움을 토해내었다. 당시 고종 임금의 승하 발표가 나자 기생, 광대, 배우들은 모두 휴업을 하고 근신에 들어갔다. 그리고 덕수궁 대한문 앞에 백성이 모여 곡을 할 때 기생들도 함께 참여하였다. 1월 27일 고종 장례에 맞춰 수원기생 20여 명은 소복을 입고, 나무 비녀를 꽂고, 짚신을 신고 수원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대한문 앞에서 망곡(국상을 당해 대궐 문 앞에서 백성이 모여 곡을 하는 것)을 하기도 하였다.” 이윤옥 지은 《서간도에 들꽃 피다 1권》에는 이렇게 대한문이 고종의 승하를 슬퍼하는 백성들이 모여 망곡을 한 장소가 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