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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띠집에 머문 세종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984]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창덕궁 궁녀들 가운데 병자가 많자 임금은 왕비와 함께 경복궁으로 옮겼다. 또 임금이 경회루 동쪽에 버려 둔 재목으로 별실(別室) 두 칸을 짓게 하였는데, 주춧돌도 쓰지 않고 띠로 덮게 하였으며, 검소하게 꾸미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정전(正殿)에 들지 아니하고 이 띠집에 머물렀는데, 지게문(마루에서 방으로 드나드는 곳에 있는 외짝문) 밖에 짚자리가 있음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말한 것이 아닌데, 어찌 이런 것을 만들었느냐? 지금부터는 내가 명한 것이 아니면, 비록 작은 물건이라도 안에 들이지 말라.’라고 했다.”

 

이는 《세종실록》 세종 3년(1421년) 5월 7일에 있는 기록입니다. 지금은 그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세종실록》 기록에 따르면 임금이 직접 명하여 사정전과 경회루 사이에 버려진 재목으로 주춧돌도 없는 작은 띠집을 만들어 그곳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것도 짚자리 하나도 명령 없이는 만들어두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계속되는 가뭄과 역병 때문에 고통 받는 백성과 아픔을 함께하기 위한 세종의 뜻이었지요.

 

 

즉위한지 세 해 밖에 되지 않은 세종은 그때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부인인 왕비 가문이 쑥대밭이 되어도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부왕 태종의 그늘에 숨어 지내야 하는 신세였던 것이지요. 더구나 연이어 높은 자리에 있는 신하들의 뇌물 사건이 터지고, 여러 가지 사건으로 조정에 대한 믿음은 그야말로 땅에 떨어진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슬기로운 세종은 자신을 묵묵히 내려놓고 띠집에 머무르는 것을 택했습니다. 우리도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세종의 띠집을 생각하고 그를 따르는 마음가짐으로 행동하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