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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봉화산 도당굿(1) - 도당의 역사와 실체

[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34]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봉화산(烽火山)은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동 산46-1번지에 있는 높이 160.1m의 산이다. 행정구역상 서울 동북부 외곽지역인 중랑구의 상봉동, 중화동, 묵동, 신내동에 접하여 있다. 이 산은 평지에 돌출된 독립 구릉이어서 한편에서는 ‘봉우재’라고도 부른다. 산 정상에는 조선시대 아차산(峨嵯山, 295.7m)의 봉수(烽燧)로 역할 하였던 봉수대(烽燧臺址, 1993년 11월 30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5호 지정)가 있다.

 

북쪽의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대이산(大伊山, 173m) 또는 한이산(汗伊山)에서 연락을 받아 서쪽의 남산(南山, 262m) 또는 목멱산(木覓山)으로 연락을 해 주는 구실을 했었다. 꼭대기에 오르면 동쪽에 아차산 봉우리가 있는 것을 빼고는 북쪽으로 불암산, 도봉산 그리고 양주 일대까지 조망이 잘되며, 서쪽과 남쪽으로도 높은 산이 없어서 남산과 이남 지역도 잘 보인다. 한편, 봉화산은 1963년 1월 1일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로 있었던 것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봉화산 정상에는 마을을 수호하는 산신각이 있는데 이를 ‘봉화제도당’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곳의 전각은 봉화(烽火)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며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의 대동제를 지내기 위해 있는 마을 도당이다. 그런데 이곳을 새롭게 지을 때 이곳이 봉화를 올렸던 곳이고 또한 이곳에 도당이 있어서 매년 제를 올렸던 곳이므로 ‘봉화제도당’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어찌 되었던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봉화산 도당이라고 부르고 매년 음력 삼월 삼짇날과 9월에 도당굿과 소치성을 지낸 온 지 오래다. 서울시를 비롯한 중랑구청 또는 중랑문화원 등에서 펴낸 책자에 보면 도당제 역사는 약 400여 년쯤 된 것이고 소개되어 있다. 민속조사를 통한 토박이 증언에 의하면, 봉화산 도당굿 당주로 역할 하였던 방 씨의 남편 최 씨가 말하기를, 이곳의 당주 계보가 13대째 된다는 것이다.

 

최 씨는 과거 이곳 도당굿을 맡아 당굿을 하였던 방 씨 무당의 남편으로 피리 악사로 활동했었다. 최 씨의 부인 방 씨 무당은 그의 시어머니(최 씨의 모친) 최 씨 무당으로부터 이곳 당주를 물려받았다. 성씨 같은 남편과 시어머니는 모자지간이다. 방 씨는 악사 최석길과 결혼하여 봉화산 도당굿의 당주가 되어 굿을 담당했었고, 그러다가 후에 박어진(일명 왕십리 오토바이 만신)이라는 서울 장안의 유명 무당도 이곳 도당굿에 참여하였다. 그러한 것은 오토바이 만신이 방 씨 남편인 최석길의 작은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봉화산 도당과 관련된 내용에서, 《봉우재 이야기(中和洞誌)》(박상록 편저, 서울중화동향토사연구소, 2000)의 ‘봉화제 도당’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세종실록(권 115, 세종 29년 3월 병인)》에 이곳 봉화산에 집을 지어 병기와 물 그리고 불을 지피는데 필요한 기물을 보관한다는 기록이 있다. 봉수대가 설치될 때 집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다가 봉수대가 없어지면서 이 집이 산신각(山神閣)으로 쓰이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집은 애초 초가 단칸이었으나 광무 4년(1900년)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단청을 올린 기와집으로 개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2년 여름에 일어난 화재로 불에 타 현재와 같이 벽돌과 시멘트 새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애초 이 건물이 나라 시설물로써 병기나 물 등 여러 기구와 식수를 보관하는 건축물이었다고 한다면 아무리 소규모로 조성하였다 하더라도 초가 단칸으로는 지어졌다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

 

한편, 이 건물 형태는 20세기 초 온 나라에 널리 있었던 당집과 비슷한 초가 단칸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칸 초가는 처음부터 봉수대 관리 영역 안의 신당으로 역할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봉수대가 세워지기 전부터 이곳에는 마을 제당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광무 4년에 정면 4칸의 단청을 올린 신당으로 바뀌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봉화산 정상의 산신각(山神閣) 안에는 조각으로 된 산신님을 모셔놓고 있다. 산신각은 정면 2칸 반 정도, 측면 1칸 반 정도의 개량식 기와집으로 벽은 벽돌로 쌓고 지붕은 우진각(네면에 모두 지붕면이 잇고, 용마루와 추녀마루로 구성된 집)으로 기와를 올렸다. 전각을 드나드는 문은 알루미늄 창틀로 두 짝을 달았다. 내부에는 80cm 높이의 제단을 만들고 그 위에 신상과 촛대, 향로, 옥수 그릇 등을 올려놓았다. 산신님 앞쪽의 천정에 삼신을 상징하는 세 개의 쇠종을 매달아 두었다. 신도가 찾아오면 쇳소리를 내어 신에게 고한다.

 

 

그리고 이곳에 봉화산 도당에서 주신(主神)으로 모셔지고 있는 산신님 또는 산신할머니를 봉안하고 있다. 불사 옷을 입혀 두었는데 한편에서는 불사할머니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신상이 주는 느낌은 마치 제석님과도 같다. 제석은 불교의 제석천(帝釋天, 도리천의 왕으로 불교의 수호신)을 뜻하지만, 무당들이 보편적으로 신봉하는 신이기도 하다.

 

신상은 전체를 흰색으로 칠하여 흰색으로 된 고깔과 장삼을 입히고 겉에다 붉은 가사를 걸친 모습의 좌상이다. 그리고 둥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산신할머니(또는 불사할머니)는 살며시 미소를 머금은 표정을 하고 있는데, 눈썹과 눈은 가늘게 표현되고 붉은 입술을 하였다. 신상 오른편 옆으로 작은 동자상도 모셔져 있다.

 

봉화산 산신각의 신상에 관하여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전각 내부에는 원래 5척 높이의 석불이 안치돼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고갈을 쓴 산신할머니 소상으로 대체되었다.”라고 한다. 그리고 어느 사람은 또한 “아주 먼 옛날 이곳에서 정성으로 산신을 모시고 있었던 할머니가 계셨는데 어느 날 세상을 떠나자 마을 사람들이 그 할머니를 모시게 되면서 산신할머니으로 섬기게 되었다.”라고 한다.

 

두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곳에 아주 오래전부터 어떠한 신앙 대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조각 형태의 신상이었다는 얘기다. 산신이라고 불렀든 불사라고 불렸든 ‘할머니’라는 신앙 대상의 실제가 모셔져 있었다는 것은 이곳 도당이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