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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교수의 환경이야기

우리나라 최초의 공해병, ‘온산병’

[이상훈 교수의 환경이야기 31]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우리나라는 1960년대부터 경제발전을 추구하면서 곳곳에 공장이 세워지고 환경오염이 나타나게 되었다. 일본의 미나마타병에 버금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수질오염 사건으로는 온산병을 들 수 있다. 경남 울산시 남쪽 해안가인 울주군 온산면은, 1974년에 정부의 경제개발정책에 따라 19개 부락 500만평이 중화학공업단지로 지정되었다. 처음에는 구리ㆍ아연ㆍ알루미늄 등 비철금속 공업단지로 지정된 후 1980년대에는 화학ㆍ제지ㆍ자동차 부품 등 다양한 업종의 공장들이 입주해 종합단지로 탈바꿈하였다.

 

그러나 공업단지 개발을 위한 종합계획도 세우지 않고 개별 공장들이 공장을 세우는 바람에 전체 주민 1만 4천여 명 가운데 1,800여 명만이 이주를 하고 나머지 1만 2천여 명은 공단에 포위되거나 고립된 채 살 수밖에 없었다. 소득이 올라가 잘 사는 마을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던 주민들에게 공장이 가동된 지 5년이 지나 1983년부터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다. 환자들은 허리, 팔, 다리가 아프고 전신으로 통증이 퍼지는 전신 신경통 증세가 발생하였는데 심한 경우에는 수족마비, 반점이 생기기도 하였다.

 

노인들에게 신경통이 나타나면 이해가 되지만 이 병은 전 연령층에 골고루 발생하였고, 처음에는 원인을 몰라서 괴질이라고 표현되었다. 괴질에 걸린 대부분의 환자는 온산만에서 나는 해산물을 많이 먹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언론을 통제하던 군사 독재 정부 시절이어서 일반 국민들은 온산병의 내막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5년 1월 18일자 한국일보 사회면 머리기사로 ‘온산공단 어민 500여명 이타이이타이 병 증세’라는 제목으로 보도가 나가면서 범국민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타이이타이 병은 일본에서 카드뮴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공해병을 말한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일본말로 아프다는 뜻인 ‘이타이 이타이’라고 신음한다 하여 이런 이름을 붙였다.

 

 

한국일보 기사가 나가자 주무부처인 환경청은 바로 다음날인 1월 19일, “온산공단 일대의 환경은 양호하다”며 “공해병이 아니다”라고 공식 부인했다. 한국공해문제연구소는 이에 반발, 다음날 환경청을 비난하며 조속한 대책을 촉구하는 자료를 내놓았다. 정부와 환경단체 간의 공해병 공방은 일부 전문가와 언론이 동조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환경청은 공해병 논란이 시작되기 전인 1984년 서울대 환경대학원에 용역을 의뢰하여 1년 동안 울산ㆍ온산공단 일대의 공해 피해 여부를 조사했다. 이 조사의 결과물인 ‘울산ㆍ온산 공해피해 주민 이주 대책을 위한 조사 연구’라는 보고서가 환경청의 공해병 부인 근거였다. 그런데 조사단을 이끈 김정욱 교수 등 전문가들이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조사 수치와 실제 상황도 차이가 있다고 언론을 통해 폭로하면서 환경청은 궁지에 몰리게 됐다.

 

온산병의 정체를 밝히라는 여론이 들끓자, 환경청에서는 역학조사팀을 구성하여 3월 말 10일간 역학조사를 실시하였다. 정부에서는 4월 23일에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온산병은 공해병이 아닌 ‘환경성 질환’이라고 어정쩡하게 표현하였다. 발표 이틀 후인 4월 25일 온산 주민 대표 2백여 명이 ‘환경청 조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결의하고 병명을 밝혀줄 것을 촉구하였다. 한국공해문제연구소도 4월 26일 환경청의 역학 조사 결과에 반박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일본에서는 공해병이 아니라는 반론을 정부보다 기업에서 먼저 제기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정부가 앞장서서 공해병이 아니라고 판정을 내려준 것이다. 온산병의 경우 근처에서 가동 중인 공장이 12개나 있었기 때문에 오염의 경로와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이 쉽지 않았다.

 

1985년 5월 9일 환경청장은 온산 현지에서 주민들과 대담을 통해, “온산 괴질은 환경요인 탓이며 주민들 이주 대책을 곧 마련하겠다.”고 말하였다. 한국공해문제연구소는 1985년 7월에 온산 현지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증상 호소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여 재차 온산병이 공해병임이라고 주장하였다. 정부는 공해병은 아니라는 단서 하에 온산 주민들을 이주시키기로 결정하고, 이주를 위해 1단계로 180억 원의 예산을 책정하였으며, 1986년과 1987년의 두 차례에 걸쳐 온산 지역 주민을 이주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주민 이주대책은 너무 성급하게 추진되었다. 정부는 먼저 보상액을 지급한 이후 나중에 2km 떨어진 곳에 택지를 조성하는 등 주민들을 위해 실효성 있는 대책을 실행하지 못했다. 일부 주민들은 일단 보상금을 받아 부채를 청산하고 생활비로 그 돈을 사용한 후 나중에 전세 비용을 마련하느라 고생하기도 했다. 이주는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주했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주민들도 있었다. 온산 주민의 이주는 계획년도인 1988년보다 3년 후인 1991년에 완료되었는데, 이주된 총 인원은 2,601명으로 애초 계획의 16%에 불과했다.

 

1985년 12월 온산지역 주민들은 11개 공해배출업체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여 인체 피해 위자료, 농작물 피해보상금 지급 판결을 받음으로써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공해피해에 대한 법적 인정을 받았다. 1986년 3월, 정부에서는 울산ㆍ온산 공단지역을 특별대책지역으로 지정하고 수질오염물질과 대기오염물질의 배출허용기준을 다른 지역보다 강화하였다.

 

일본의 공해병과 견줄 때에 온산병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공장 가동 후 발병까지 매우 짧았다. 일본의 미나마다병은 공장이 가동된 후에 20년이 지나 병이 발생하였는데, 모든 것을 빨리빨리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5년 만에 병이 발생하였으니 개발독재 시대의 부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온산병의 원인은 한 가지가 아니고 가해자가 불분명한 게 특징이었다. 당시 온산공단에는 석유화학 5개 공장, 비철금속 5개 공장, 기타 2개 공장 등 각기 다른 공해물질을 배출하는 12개 공장이 가동 중이었다. 주민들이 비슷한 증상을 일으킨다 해도 어느 공장의 공해 때문인지 정확하게 인과관계를 밝히기가 매우 어려웠다. 환경과 공해연구회는 온산병 사태의 종합보고서격인 ‘우리 애들만은 살려주이소!’(민중사, 1987년)에서 온산병 환자수를 1,500~2.000명으로 추산했다.

 

 

온산병 사건은 용기 있는 언론을 통해 사회 문제로 확산되었으나 공해 문제에 대한 정부의 무성의한 태도로 인해서 국민들의 관심이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지만 온산병 사건을 통해서 우리나라 국민들은 경제발전의 상징인 공장이 부의 상징이 아니라 환경을 오염시키고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다 건너 일본의 일인 줄만 알았던 공해병이 한국에서도 나타났다는 사실이 그 당시 국민들에게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경제발전이 진행되면서 국민소득이 늘어난 1990년 이후로는 어느 마을에 공장이 들어오면 환영하는 대신 반대하는 분위기가 뚜렷하다. 공해 산업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해병으로 인정된 온산병은 국민들에게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만든 사건이었지만 아직까지도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