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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맛’을 통한 뒤 독단하는 세종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3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세종이 독단을 내리는 때

 

세종의 정치는 사맛[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을 통해 나타난다. 많은 경우 신하들과의 토론을 나누지만 그 마지막은 임금의 결단이 따른다. 그 결단은 생각/사유의 결과이기도 하다.

 

세종 이도의 사유세계는 유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뿌리에는 불교가 있고 마음속에는 심학이 있다. 정신의 핵심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유가에 집착하지 않은 포용성이다. 이는 임금이라는 직(職)에 충실한 실천적인 실용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의 직에 대한 태도는 유교적인 것만이 아닌 불교의 ‘업’ 개념이 섞여 있다.

 

 

그리고 도학, 심학 그리고 종교와 풍속의 영역에서 무가, 풍수도 이해하려 했다. 결코 한 사상에 매몰되지 않고 그 사상을 백성[나라]과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가를 가늠했다. 세종은 사맛 정신으로 정치를 수행하며 마지막은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대면하여 듣고 토론을 거치지만 확신이 가는 일은 권도로서 독단 처리하게 된다.

 

독단(獨斷) : 무릇 일이 의심나는 것은 여러 사람에게 의논하지만은 의심이 없는 것은 독단으로 하는 것이다. (《세종실록》 30/7/18) 凡事之可疑者則謀於衆, 無可疑者則獨斷爲之。

 

권도 : 그대들은 법으로서 말했지만 나는 권도(權道)로서 행한 것이다. (《세종실록》 14/12/17) 上曰: 爾等以法言之, 予以權行之。

 

이 과정에 권(權)과 경(經)이 있다. “법은 융통성과[權]과 원칙[經]중에서 그 어떤 한가지만을 고집할 수 없다.”(《세종실록》 25/10/12) (上曰: 法有權經, 不可執於一也。)

 

세종은 여러 사람의 의논에 좇지 않고, 대의(大義)를 가지고 강행하는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이 가운데는 수령육기(守令六期, 조선시대 수령의 임기를 3~6년으로 연장한 법)의 행정, 양계축성(兩界築城, 평안도 함경도 지역의 성 쌓기, 《세종실록》 26/윤7/23)같은 국방 문제를 비롯하여 공법(貢法, 조선 전기 토지에 대한 세금 제도)의 진행, 불교신앙, 양녕 형님에 관한 우애, 훈민정음 창제 들이 있다.

 

세종의 행위는 거의 모두가 공공적인 정치로 나타나지만 그 가운데는 개인적인 성격이 혼재된 분야의 일도 있다. 양녕 형님에 대한 문제는 개인적인 도리에 따르고, 불사(佛寺) 보수 등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일로 수비적인 자세를 취하지만 반면에 오랫동안 준비해온 훈민정음 창제는 느닷없이 발표하고, 창제 이후 논쟁에서는 적극적 공세를 취한다. 신념과 철학의 소산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불교 신앙은 신념의 문제로 훈민정음은 천지인(天地人) 삼재와 음양의 철학에 따른 역사의 과업으로 삼고 있다.

 

마지막 행도(行道)는 자기 희생

 

세종이 독단 뒤에 취하는 행동은 무엇일까. 스스로를 절제하고 자기희생을 감수한다. 그중에는 재난을 당해서 세종은 친아들ㆍ친손자의 과전(科田)을 줄이게 하여 솔선수범(nobless oblige)한 일이 있다.

 

스스로 줄이기 : 한갓 천록(天祿, 하늘이 주는 복록)을 허비하고 영선(營繕, 집을 짓거나 수선하는 일)이 또한 많아, 감응(感應, 마음이 따라 움직임)으로 부른 재앙이 있는가 생각되어 내가 심히 부끄럽다. 그 나머지 왕실 사람들의 과전은 갑자기 줄일 수 없으므로 친아들ㆍ친손자의 과전(科田)을 줄이려고 하는데, 여러 사람의 뜻은 어떠한가.... 금후로는 대군의 밭은 2백 50결에 지나지 말게 하고, 여러 군의 밭은 1백 80결에 그치게 하라.” ... 하고, 드디어 호조에 명하여 영구한 법으로 만들었다. (《세종실록》 19/1/12)

세종의 마지막 행도(行道)는 자기희생에 따른 헌신이다.

 

몸의 수고 : 내가 만일 곧 잊어버려서 덮어두고 하지 않으면 나의 병든 몸에도 좋겠다. 다만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몸이 수고로움을 당하여 편안한 것을 뒷사람에게 물려주라.’ 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잊지 못하는 것이다. (《세종실록》 28/6/18) (但古人云: ‘身當其勞, 以逸遺後。’ 此予之未能忘也。)

 

내 몸이 고달프더라도 뒷사람을 위하여 일한다는 정신은 세종의 근면함을 통한 희생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글 읽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글씨를 쓴다든지 글을 짓는 것은 임금이 유의할 필요가 없다.( 讀書有益如寫字製作 人君不必 留意也。)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

 

세종은 스스로 임금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하고 있었다. 글을 읽고 깨달아 이를 정치에 반영하는 것이 직(職)이며 업(業)이라고 여겼다. 당시 일반적이던 선비의 멋진 글씨나 시짓기는 임금이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세종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항상 글을 읽었고 《좌전(공자의 제자 좌구명이 《춘추(春秋)》를 해설한 책)》 《초사(楚辭, 중국 초나라를 중심으로 한 문학 작품을 모은 책)》 같은 것은 백번을 더 읽었다. 일찍이 몸이 편치 못한 데도 글을 읽자 태종은 내시를 시켜 책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오게 하였는데 나중에 보니 병풍 사이에 《구소수간(歐蘇手簡)》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세종실록》 5/12/23)

 

끊임없는 자기 수련으로 유교에서는 수기치인(修己治人, 내 몸을 닦고 나서 남을 다스린다는 것) 정신에 따른 수신(修身), 불교는 수행(修行)이라고 하는데 세종은 끊임없는 독서를 통한 자기수신의 생활을 했던 것이다. 생각하는 정치를 한 세종의 일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