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우리문화편지

84년 전 오늘 임시정부국무총리 이동휘 순국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004]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84년 전 오늘은 러시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李東輝, 1873.6.20~1935.1.31) 선생이 하바로브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오던 도중, 심한 독감에 걸려 순국한 날입니다. 선생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단천군수 심부름을 하는 통인(通引)으로 들어갔다가 군수가 어린 기생에게 온갖 추행을 저지르자 화로를 군수의 머리에 뒤엎는 대담한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뒤 선생은 사관양성소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가 된 뒤 청렴강직과 충성심을 높이 산 광무황제(고종)에 의해 삼남검사관이 되어 부패한 장교들과 지방관리들을 엄격하게 처벌함으로써 온 나라에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선생은 1919년 11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직에 취임하였습니다. 그 뒤 미국에 있던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미국 동포들의 대한인국민회총회에서 받던 독립운동자금을 독점하자 상해임정은 재정적 어려움과 침체상태에 빠지게 되었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은 1920년 중반 6명의 임시정부 차장들과 함께 대통령 이승만 불신임운동을 펼쳤지만 안창호ㆍ이동녕ㆍ이시영ㆍ신규식 등 이른바 ‘기호파(畿湖派, 독립운동가 가운데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 경기지역 출신 계열)’들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선생은 혁명적 방법에 의해서만이 조국광복을 달성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녔던 진보적 민족혁명가였으며, 특히 조국광복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추구했던 부류의 정치가를 배격하는 독립운동지도자였습니다. 조국을 위한 일이라면 모든 일에 앞장서고 사회적 제약을 과감히 개혁코자 했던 혁명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합니다. 선생은 아버지 이발, 딸 이인순ㆍ이의순, 사위 오영선ㆍ정창빈이 모두 서훈받은 독립운동가 집안이며,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