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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여자광복군 서훈자 28명과 31명 중 어느 것이 맞나요?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기록물에 쓴소리 (6)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광활한 중국대륙 여자 광복군 맏언니 ‘오광심’, 백범이 인정한 여자광복군 1호 ‘신정숙’ 핏덩이 안고 광복군으로 뛴 ‘유순희’, 중국 군인도 무서워 벌벌 떤 여자 광복군 ‘이월봉’

..... 이는 필자가 여자광복군들의 삶을 추적하여 쓴  시 제목이다. 일제강점기 때 여자광복군은 씩씩했고 늠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일항쟁을 위한 준비로 1940년 9월 17일 중경에서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였다. 광복군은 창설 직후 총사령부와 3개지대를 편성하였으며 총사령부는 지청천 장군을 총사령으로, 참모장으로는 이범석, 제1지대장 이준식, 제2지대장 공진원, 제3지대장 김학규 등이 임명되어 단위 부대 편제를 갖추었다. 총사령부는 약 30여명 안팎의 인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초기 여자광복군으로 지원한 사람은 오광심, 김정숙, 지복영, 조순옥, 민영주, 신순호 등이었다. 이들은 주로 사령부의 비서 사무 및 선전 사업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광복군은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한인 항일군사조직을 흡수하여 통합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1941년 1월에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편입되었으며, 1942년 7월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흡수되었다. 그렇다면 여자광복군으로 활약하여 서훈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몇 명일까? 그것을 확인해주는 곳이 국가보훈처이다.

 

인터넷, 국가보훈처 → 보훈인물→ 인물찾기로 들어가면 2개의 방이 있다. 하나는  <독립유공자공적조서>와 다른 하나는 <독립유공자공훈록>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개의 방에 기록된 <여자광복군> 자료가 서로 틀리다. 같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자광복군 숫자가 <독립유공자공적조서>에는 31명이고,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28명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맞을까?

 

 

<독립유공자공훈록> 지침에 이르길 “독립유공자공훈록은 독립유공자공적조서를 바탕으로 독립운동 기간의 공적 및 주요활동의 역사적 사실을 전문가의 집필을 통해 책으로 발간된 내용입니다.”라고 밝히고 있으므로 정확한 것은 31명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독립유공자공훈록>에서 누락된 인물은 누구일까하고 일일이 대조해보니 윤경렬(1982. 대통령표창), 이옥진(1968. 대통령표창) , 전흥순(1963. 대통령표창) 세분이 빠져있다. 국가기록의 생명은 정확성이다.  300명도 아니고 31명밖에 안되는 여자광복군 서훈자를 3명이나 누락하여 기록하고 있으니 나머지는 어떠할지 모르겠다. 여기서 나머지란 국가보훈처에서 분류하고 있는 운동계열을 말하며 여기에는 광복군을 포함하여, 학생운동, 3.1운동, 의열투쟁, 임시정부, 일본방면, 만주방면, 노령방면, 미주방면 등등이다.

 

차제에 이들 계열별 인물들이 <독립유공자공적조서>와 <독립유공자공훈록>의 숫자가 같은 지를 확인하여 누락자가 있으면 수정해주길 바란다. 보훈처 자료 이용자들은 아무 의심없이 두 자료 가운데 하나를 인용할 것이기에 세심한 정확성이 요구된다. 이 경우에 여성뿐만이 아니라 남성들도 두 자료 사이에 누락자가 없는지 확인해서 단 한 명의 누락자도 생기지 않도록 조치해야 할 것이다. 

 

쓴소리는 <7>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