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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한국 근대사의 산증인 송진우선생의 고택을 찾아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 근대사의 큰 인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를 치열하게 살다 암살의 흉탄에 생을 마감한 고하(古下) 송진우선생의  생가를 찾았다. 선생의 생가는 전남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에 있는 한국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농촌 집이다. 집의 구성은 따뜻한 지방의 가옥 모습으로 각각 일자(一字) 형태로 문간채, 안채, 그리고 곳간채로 구성되었다.

 

 이 농가는 조선조 양반가의 집처럼 번듯한 기와집도 아니었고, 또 웬만한 양반가의 집처럼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가 별도로 구획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 집은 담양지역 양지바른 경사진 언덕에 돌로 축대를 쌓아 평평한 대지를 만들고, 그 대지 위에 터를 다듬어 집을 지은 것이다. 

 

이 집은 송진우선생이 한국에서 교육 언론에 종사하면서 독립운동에 공헌한 중요인물로 인정되어, 생가터에 다시 복원한 집이다.  그런데 선생이 살았던 당시의 집이 아니어서 한편으로는 아쉬웠고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라도 복원되어 다행스러웠다.

 

이 집은  한말 의병장 성재 기삼연(1851~1908)이 1896년 전남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1902년 체포되었고 이후 감옥을 탈출하여 은거했던 집이기도 하다. 기삼연은 고하 송진우가 어린시절 이 집에 머물면서 그에게 한학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고, 또 나라의 중요성을 일깨워 송진우에게 독립의 정신을 깊이 심어주었다. 고하(古下)라는 송진우선생의 호 또한 기삼연 의병장이 지어준 것이다.

 

송진우 선생은 1890년 양력 6월 11일 태어나 조선말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보면서 자라났다. 13살 어린시절 의병장 기삼연이 그의 집으로 피신하여 함께 있는 동안 그에게  한학과 민족정신을 배웠던 것이다. 그는 차츰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1905년 을사늑약 뒤 신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전북 부안 변산에 있는 내소사 청련암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새로운 친구 백관수를 만났다.

 

그 때 그와 함께 일본유학을 결심하고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907년에는 영학숙에 들어가 김성수를 만나게 되었고, 평생동지가 되었다. 1년 뒤 1908년 10월 김성수와 함께 일본유학을 떠났다.

 

송진우 선생은 일본유학에서 귀국한 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48인의 한사람이기도 하였으며,  김성수와 함께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인재양성에 몰두하였다. 선생은 중앙학교의 교감과 교장을 역임하며 교육사업을 하였다. 또한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을 펼쳤으며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체포되었으나 민족대표로 서명한 33인에는 포함되지 않아 곧 석방되었다.

 

3.1만세운동 이후 현실에 주목하여 국내에서 실력있는 인재를 기르고 기업을 운영하여 돈을 모아 독립운동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선생은 1920년 학교설립을 하기 위하여 모금운동에 나섰다가 일제경찰에 붙잡히기도 하였다. 송진우 선생은 친구였던 김성수와 함께 동아일보를 창간하여 동아일보 사장, 주필, 고문등을 역임하며 언론활동을 활발히 하였고,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기성회운동, 브나로드운동 등을 지원하였으며,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며 창씨개명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언론인으로 총독부로부터 부단한 회유를 받기도 하였으나 거부하였으며, 1936년 동아일보 사장시절에는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손기정선수의 일장기를 지우는 사건을 주도하여 조선과 일본을 발칵 뒤집기도 하였으며, 그 일로  동아일보 사장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에는 안재홍, 여운형, 장택상 등과 함께 일본의 패망을 주장하기도 하였는데, 선생은 당시 국외 단파방송을 듣고 태평양전쟁의 실상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총독부경찰은 단파방송을 접하거나 관련된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고 나서기도 하였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여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 법통론을 주장하며, 1945년 9월 16일 한국민주당의 초대 수석총무가 되었으며, 폐간되었던 동아일보의 사장으로 다시 취임하였다. 선생은 두 기관의 대표로 해방정국을 이끌며 한국의 민주국가건설에 앞장섰다. 이후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문제가 터진 후, 반탁과 찬탁의 소용돌이 속에 찬탁론자로 몰려 12월 30일 새벽에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 등 6인의 총에 피살되고 말았다. 그의 나이 56살이었다.

 

암살된 송진우선생은 1946년 망우리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46년 11월 영등포구 신정동으로 이장하였고, 이후 독립운동에 대한 공이 인정되어 1988년 5월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이장되었다. 묘지가 이장되자 그의 묘지앞에 세워졌던 석물들은 담양 생가인 그의 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선생의 평생 독립운동 행적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추서되었고, 1983년 9월에는 어린이대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자라나는 후세에게 독립정신의 귀감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이후 1991년 생가터인 담양군 담양읍 만성리 공원에는 고하 송진우 추모비가 세워졌으며, 그 추모비는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송진우선생은 기울어져가는 나라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나라를 되찾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적국이지만 배울 것은 배워서 그 실력으로 후세교육과 국민의 의식개혁을 위하여 언론에 투신하였다. 패망한 일본에 어렵게 되찾은 나라에서 목표는 같으나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다투다 같은 민족의 손에 목숨을 거둔 선생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가 간 뒤 70년도 더 되는 오늘도 아직도 통일되지 못한 한민족의 비극을 깊이 생각해 본다.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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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