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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탑골공원 독립만세, 순식간에 온 장안에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025]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탑골공원 팔각정 단상에서 독립선언서를 두 손으로 높이 들고 떨리는 목청으로 독립선언서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이후 학생들이 거리로 나서자 시위 군중은 엄청나게 늘어납니다. 만세운동의 날을 3월 3일 고종황제의 인산(因山, 국장)에 맞춘 덕에 이를 보러 상경한 군중까지 모두 함께 한 것입니다. 이때 길은 흰옷 입은 사람들로 꽉 찼음은 물론 어린 여학생들과 부엌 살림하다 나온 아낙, 지팡이를 짚은 노인 등도 끼여 있었지요.

 

 

3·1만세운동 준비 때부터 참여했던 중앙학교 교사 현상윤은 동아일보 1949년 3월 1 치에 실린 <왕년의 투사들 회고담>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탑골공원에서부터 만세성(萬歲聲)이 일어나는데 순식간에 장안을 뒤집어놓은 것같이 천지를 진동했다. 시내 전체가 문자 그대로 홍진만장(紅塵萬丈, 햇빛에 비치어 붉게 된 티끌이 높이 솟아오름)이 되었다. 시가는 전부 철시(撤市)했고, 가가호호에서는 납세 거절을 부르짖었으며, 각 가정에서는 관공리(官公吏)들이 사표를 쓰느라고 바빴으며, 학교 등에서는 앞을 다투어 파업을 일으켰다.”

 

3.1만세운동이 있기 전인 1919년 1월 21일 새벽 광무황제(고종)가 갑자기 승하했습니다. 일제가 황제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온 겨레는 커다란 슬픔과 분노를 느꼈지요. 경성은 3월 3일 국장일(國葬日)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홍역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온 나라 곳곳에서 출발한 경성행 임시열차가 속속 도착했고, 이미 200여 개의 경성 여관들은 초만원이었다고 하지요. 숙소를 잡지 못한 지방 사람들은 친지나 하숙집을 찾았고, 심지어 길에서 노숙까지 했다는 얘기가 이희승의 《3·1운동50주년기념논집》 ‘내가 겪은 3·1운동’에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