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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소치묵묘첩》 – 풍진 세상에 붓끝으로 피워낸 화왕

[큐레이터 추천 유물 72]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어른 손바닥 두셋을 이은 크기의 화첩(畫帖)입니다. 종이를 여러 겹 바른 누런 표지에는 세월의 흔적이 곱게 배었습니다. 그 위에는 제목을 적은 흰 종이가 살포시 붙어 있네요. 단정하면서도 굳센 필치로 “소치묵묘(小癡墨妙)” 넉 자가 쓰여 있습니다. 글씨 아래 찍힌 도장을 볼까요. 좀 흐릿하지만 “소치(小癡)” 두 글자입니다. ‘소치’는 조선의 화가 허련(許鍊, 1808~1893)의 아호(雅號)이니, 이 표지를 열어젖히면 허련의 붓이 그려 낸 묘한 세계가 있나 봅니다.

 

 

표지를 넘겨보니, 하얀 장지(壯紙)를 접어 만든 네 쪽 바탕 위에 모란 두 송이가 피었습니다. 다른 채색 하나 없이, 오로지 먹의 농담(濃淡, 짙음과 옅음)만으로 모란 줄기와 이파리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흰 꽃잎 위에 흩뿌리듯 표현된 꽃술에서 얼핏 향기가 스치는가 싶더니, 그 위에 적힌 화제(畫題) 한 구절이 빛을 더합니다.

 

피어나지 않아도 향기를 눈처럼 뿜고

감추어 두어도 꽃술은 금을 흩뿌리리

 

 

아코디언처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만든 각 폭마다,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부드럽게 개성을 한껏 드러내는 묵모란이 모두 여덟. 여기에 당송(唐宋)의 이름난 시인들이 모란을 예찬한 시구(詩句) 하나씩을 더했습니다. “유어예(遊於藝)”, 곧 육예(六藝)에 노닌다는 《논어(論語)》의 구절을 새긴 머리도장까지, 정성을 다한 것이 과연 “묵묘(墨妙)”라는 이름을 붙일 만합니다. 이 모란 화첩을 그린 허련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섬 소년의 꿈같은 생애

 

서울에서 천 리가 넘는 전라도 해남 고을, 거기서도 그 험한 울돌목을 건너야 닿는 섬 진도(珍島). 허련은 그곳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양반이었으나 여러 대에 걸쳐 기울어진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해남 대흥사에 머물던 초의(艸衣, 1786~1866) 스님을 만나면서 예술의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초의는 허련이 그린 그림을 오랜 벗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에게 보냈는데, 김정희는 그 그림을 보고 초의에게 이렇게 말했다는군요.

 

“아니, 이와 같이 뛰어난 인재와 어찌 손잡고 함께 오지 못하셨소. 만약 서울에 와서 있게 하면 그 진보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오. 그림을 보내 주어 마음 흐뭇하게 기쁘니 즉각 서울로 올라오도록 하시오.”

 

서울로 올라온 허련에게 김정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畫)의 정수(精髓)를 전해 주고, 허련도 김정희를 지극정성으로 섬겼습니다. 김정희가 제주로 유배되자 허련은 배를 타고 세 번이나 제주로 들어가 스승을 모시며 공부를 합니다. 그렇게 성장한 허련은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이런 그림이 없다![鴨江以東 無此作矣]”는 찬사를 받습니다. 그의 명성은 궁궐까지 전해져, 헌종(憲宗, 재위 1834~1849) 임금이 직접 그를 불러 어전(御前)에서 그림을 그리게 하고 같이 중국의 옛 서화를 감상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그야말로 최고의 영광이었지요.

 

그러나 헌종과 김정희, 초의 같은 그의 후원자들이 숨을 거둔 뒤, 허련의 말년은 곤궁해졌습니다. 여전히 그를 찾고 아끼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자부심을 가슴에 품은 채 방랑하게 된 허련은 만나는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해 그림을 그려 주며 노자를 받는 처지가 됩니다. 시중을 드는 사람마저 도망가 버릴 정도로 그의 행보는 고달팠습니다.

 

모란에 깃든 19세기의 소망

 

허련은 ‘허모란’이라 불릴 정도로 모란을 특히 많이 그렸습니다. 그의 모란은 당대부터 정평이 나 있었는데, 벽오당(碧梧堂) 나기(羅岐, 1828~1874)나 추금(秋琴) 강위(姜瑋, 1820~1884) 같은 문인들이 시를 지어 허련의 모란 그림에 찬사를 보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큰아들 정학연(丁學淵, 1783~1859)은 허련의 모란을 좀 달리 바라봅니다.

 

천보(天寶) 연간 악공(樂工)의 한바탕 꿈만 남았는가

어부의 집에 몇 해 동안 푸른 파도만 차가웠던지

그대 가슴 속 연하(煙霞)의 모습은 알지 못하고

다만 “남쪽 고을 허모란”이라고만 말하는구나

 

허련은 여느 문인 못지않은 교양을 지니고 있었고 산수나 사군자를 포함한 다양한 주제의 그림에 능했습니다. 하지만 허련에게 그림을 청하는 사람들은 대개 모란 그림을 원했습니다. 그에 맞추어 그려 주다 보니 어느덧 모란으로 이름을 얻고 말았다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허련의 시대, 곧 19세기의 조선 사람들은 왜 그토록 모란 그림을 갖고 싶어 했던 것일까요. 널리 알려져 있듯이 모란은 꽃의 왕[花王], 부귀화(富貴花)라고도 합니다. 말 그대로 부귀영화를 뜻합니다. 허련은 모란을 대개 괴석(怪石)과 함께 그리곤 하였는데, 괴석은 장수를 상징하지요. 이 둘을 합치면 오래 살고 부귀를 누리시라는 의미가 됩니다.

 

19세기는 세도정치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는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중앙의 경화사족(京華士族, 번화한 한양과 그 인근에 사는 선비)들이 나름의 문화를 꽃피웠고, 상민(常民) 중에서도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층과 외국과 교역하는 상인층이 성장하던 역동적인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너른 들판이 많았던 호남 지방에는 새로 일어난 부자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은 부귀나 장수처럼 세속적 가치가 담긴 그림을 선호했습니다. 모란과 괴석은 그들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소재였지요. 호남 출신인 허련이 그려 낸 모란이 당대부터 유명해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시기 민화(民畫) 중에 모란과 괴석을 그린 병풍이 적지 않게 전하는 것도 같은 까닭입니다.

 

종이를 펼치니 꽃이 피어나네

 

허련은 대개 먹만으로 모란을 그렸습니다. 이는 허련이 화려한 채색을 멀리하고 먹으로 사의(寫意), 곧 자신의 뜻을 풀어내는 데 집중했던 남종문인화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또 물감을 일일이 짊어지고 다니기 어려웠던 허련의 처지가 반영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 화첩의 모란도 먹만으로 그렸습니다. 언뜻 보면 아주 거칠지요. 그럼에도, 이 화첩 속 모란은 퍽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짙고 옅음을 조절해 가며 희고 검은 모란을 틔운 솜씨를 보면, 왜 ‘허모란’이라는 이름을 얻었는지 알 듯 합니다. 화제 글씨에서도 추사체의 향기가 물씬 풍깁니다.

 

 

병풍이나 족자가 아니라 화첩에 그린 점도 특이합니다. 늘 걸어 놓거나 펼쳐 놓지 않고, 보고 싶을 때 꺼내서 한 폭 한 폭 열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아마 그려 달라고 한 이가 부탁을 했겠지요. 이것을 보면 이 화첩의 주인은 재력뿐만 아니라 교양과 인격도 제법 갖춘 이였나 봅니다. 나이 들고 지친 화가를 얼마나 융숭히 대접했기에, 이렇게 작은 화면을 너르게 펼쳐 정성스레 모란꽃을 피워 주었을까요. 화첩 그림을 하나하나 완성할 때마다 화가의 입술엔 웃음이 살짝 걸렸을 것 같습니다.

 

지금 보면 낡은 옛날 꽃그림이라고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백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온 이 《소치묵묘첩》 속에는 19세기를 살다 간 한 화가의 마음과, 그가 겪고 느껴야 했던 시대의 소망이 한껏 녹아 있습니다. 그것을 읽을 수 있다면, 또 다른 눈으로 19세기의 조선을 볼 수 있을 겁니다.

 

* 국립중앙박물관(강민경)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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