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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민족대표 중 가장 늦게 출소한 이승훈 선생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04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19년 3월 1일 낮 2시 태화관에서 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29명의 민족대표들은 태극기에 경례를 한 다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 3창을 합니다. 그 직후 민족대표들은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었으며,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민족대표 가운데 이승훈 선생은 누구보다도 강경한 독립정신 탓에 가장 오래 옥고를 치러 3년이 넘은 1922년 7월 22일에야 출옥하였지요.

 

 

그 이전 이승훈 선생은 1907년 민족운동의 요람이 된 오산학교를 세우고 교장이 되어 교육운동에 매진했습니다. 또 1910년 말 안중근의 4촌 동생 안명근이 독립 군자금을 모금한 일로 ‘안악사건’이 발생하자, 선생은 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리고 1911년 9월 일제는 ‘테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민족운동가들을 대거 체포한 ‘105인 사건’을 일으켰는데 일제는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선생을 이 사건 주모자로 몰아 온갖 고초를 겪게 하였지요. 그 결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15년 2월에야 가출옥하였습니다.

 

3.1만세운동 뒤 옥고를 치르다 풀려난 선생은 고향 평북 정주로 돌아와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쏟았고, 물산 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참여하였지요. 또 <동아일보>가 1924년 내우외환의 위기에 빠졌을 때, 그 사장으로 추대되었으며, 그 해 5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를 맡아 ‘민족지’의 경영 정상화에도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던 이승훈 선생은 1930년 병이나 67살을 일기로 세상을 뜨고야 말았습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오늘은 이승훈 선생이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