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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왜곡한 ‘장승’과 ‘벅수’ 이야기

현재 우리땅에 남아 있는 장승은 없다

일제가 왜곡한 ‘장승’과 ‘벅수’ 이야기 1

[우리문화신문=황준구 민속문화지킴이] 

 

황준구 선생은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20여 년 동안  '장승'과 '벅수'가 왜곡되고 변질된, 내력을 추적하고 밝혀내는 공부를 하고있다. 이에 우리신문에서는 황준구 선생을 따라 어떻게  '장승'과 '벅수'가 왜곡되고 변질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우린 예전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여장군(地下大將軍)’을 보고 자랐다. 그런데 이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여장군(地下大將軍)’을 사람들은 장승이라 부른다.

 

심지어는 이 세상에 태어나 ‘장승’의 실제모습을 한 번도 본적이 없고, ‘장승’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자칭 ‘장승’ 전문가들 끼리 모여, 장승제, 장승축제, 장승명인, 장승쟁이, 장승보존회, 장승학교 등으로 이름을 짓고, 모두들 ‘장승’의 명인(名人, 대가)이라고 큰소리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기능의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여장군(地下大將軍)’은 ‘장승(長栍)’이 아니라 ‘벅수(法首)’라고 불러야 옳은 표현이다. ‘벅수’였던 것이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장승’이 되어버렸다. 1912년부터 준비하여 1933년에 완성된 <조선어 철자법 통일안>의 확정에 따라 ‘미신(迷信)’으로 분류된 ‘벅수’는, ‘장승’에 포함되어 ‘장승‘이란 표준말에 속해버린 것이다.

 

실제 ‘벅수’와 ‘장승’은 서로의 기능과 역할이 다른 전혀 별개다. 먼저 장승의 연원을 한번 따라가 보자.

 

서기 487년 신라 21대 ‘소지왕(炤知王)’은 우리땅에서는 처음으로 ’길’을 넓혀 관도(官道)를 만들고 ‘우역’(郵便驛)을 설치하였으며, ‘역참(驛站)제도’를 도입하여 나라의 땅과 ‘큰길’(官道, 國道)을 합리적이며, 과학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하기 위하여, 일정한 거리마다 현재의 위치를 표시하고 안전하고 빠른 ‘길’을 안내하는 기능의 ‘돈대(墩臺, 푯말)를 세운 다음 ‘장승(長栍)’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길을 가는 나그네와 벼슬아치들에게 빠르고 안전한 길을 안내하기 위하여, ‘장승’의 가슴에 <현재의 위치와 이웃마을의 이름과 거리 그리고 방향>을 바르고 확실하게 표시하고, 장승의 얼굴에는, 중국에서 길을 따라 들어오는 ‘잡귀(雜鬼)와 무서운 ‘유행병’(疫病)들을 막아내기 위하여, ‘미르(龍)’ 또는 ‘치우(蚩尤)’의 무서운 얼굴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조각하였다. 또 5리와 10리에는 작은 ’장승’을 세우고, ‘역’과 ‘참’이 있는 30리에는 큰 ’장승’을 세웠다. 우리 조상들은 이 ‘장승’이 세워진 곳을 ‘장승’이 박혀있다 하여, ‘장승배기’(장승박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장승’을 주로 ‘후’堠(댱승ㆍ후)라 쓰고, ‘댱ㆍ승’ 또는 ‘쟝ㆍ승’(장승)으로 읽었다. 그리고 30리에는 ‘일식(一息)’이라 하여, ‘역’과 ‘주막’을 두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였다.

 

 

정조 13년(1789) 이의봉(李義鳳, 1733-1801)이 쓴 《고금석림(古今釋林, 辭書)》에는, “‘댱승’은 우리의 것이며, ‘국도’의 10리나 5리에 나무로 만든 사람을 세우고, 모자(帽子) 꼴을 씌워서, 몸의 가운데에 땅의 거리 리수(里數)를 썼다. 이것을 ‘댱승’(栍; 댱승, 생)이라고 한다. 한어(漢語)로는 ‘토지노아(士地老兒)라고 한다.”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栍‘이란 한자는 중국에는 없는 조선이 만든 한자다. 또 《몽어유해(蒙語類解, 1768)》와 《역어유해(譯語類解)》에도 ‘토지노아’를 ‘쟝승’으로 기록하고 있다. ‘댱승’과 ‘쟝승’은 함께 쓰였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1818)》에서 “장승 옆에 ‘홰나무’(회화나무)를 심어서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그늘을 제공하여, 쉬어갈 수 있는 덕(德) 베풀어야 한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던 ‘장승’은 1876년 개화기를 시작으로 하여 점점 사라지기 시작 하였다. ‘우정국(郵政局, 우편제도)이 도입된 뒤인 1895년에는 ‘역참제도’가 완벽하게 폐지되어, ‘길’을 안내하던 기능의 ‘장승’은 주어진 임무를 끝내고, 우리땅에서 영원히 사라져 없어졌다. 이런 역사를 가진 ‘장승’에 우리 조상들이 ‘제사(祭祀)를 모셨다.’라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런데도 조선총독부는 고려시대 때 절집(寺刹)에서 서민들을 상대로 하여 운영하였던, ‘사채업’(高利貸金)의 한 종류인 ‘장생고(長生庫 - 長生錢, 長生布)와 ‘절집’의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의 ‘장생표주(長生標柱 - 國長生, 皇長生)가 ‘장승’의 뿌리라는 뚱딴지같은 억지를 부렸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문화에 열등의식을 가졌던 조선총독부는 우리 땅에서 완벽하게 사라져 없어진 ‘길’을 전문으로 안내하던 기능의 ‘장승’을,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의 ‘벅수’에 뒤늦게 포함시켜, ‘민속신앙’의 대상물로 왜곡하고 변질 시켰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공부한 우리 민속학자 1세대들은 이에 한마디 반론도 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쓴 논문과 책에는 ‘장승’의 뿌리는 ‘장생고’와 ‘장생표주’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슬픈 이야기다.

 

그뿐만 아니라 1966년에 개관한 우리의 ‘국립민속박물관’은 전국의 ‘민속자료’들을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하였는데 각 지방의 토속적이고 독창적인 ‘민속용어’ 표현들은 깡그리 무시를 하였고, ‘벅수’를 ‘일제강점기’ 때의 표현대로, ‘장승’으로 통일하여 기록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지금도 ‘국립민속박물관’은 ‘벅수’를 ‘장승’이라고 표현한다. 더 나아가 지금 ‘교과서’와 모든 ‘백과사전’에도 ‘장승’으로 표현하고 있다. ‘장승’이라는 표현이 일제강점기의 찌꺼기라는 것을 그들은 아직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땅에서 없어진 ‘장승’이 현재 일본을 제외한 외국의 ‘박물관’에서는 4개가 발견되고 있다. 큰 ‘장승’ 1개는 독일의 ‘베를린 민족학 박물관’에 있고, 작은 ‘장승’들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민속박물관’과 네덜란드의 ‘라이덴 국립민속박물관’과 독일의 ‘라이프치히 그라시 민속박물관’에 각각 전시되고 있다. ‘도둑질’의 천재인 이웃나라 일본은, 수십 점의 ‘장승’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침묵만 하고 있다.

 

분명히 말하건대 현재 우리땅에는 남아 있는 장승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