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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왜곡한 ‘장승’과 ‘벅수’ 이야기

상도동 '장승배기'의 진실

우리의 민속문화, 정부기관이 앞장서서 왜곡
[일제가 왜곡한 ‘장승’과 ‘벅수’ 이야기 3]

[우리문화신문=황준구 민속문화지킴이]  문화체육관광부가 누리집을 이용하여 국민에게 전달하고 있는 정보들 속에는, 우리의 민속문화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변질시키고 있는 내용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 민속문화의 뿌리인 '수호신'역 할의 '벅수(法首)‘와 '이정표' 역할의 '장승(長栍)’을 서로 구별하지 못하고, 일제강점기의 '찌꺼기'로 알려진 표현(말)들을, 지금도 부끄러움 없이 앞장서서 쓰고 있다.​

 

1991년 바르게살기 동작구위원회와 동작구청, 서울시청,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가 연합하여, 동작구 상도동 '장승배기'의 '역사'를 아무 까닭 없이 왜곡하고 변질시켜, 집중적으로 홍보를 한 이후부터, 30여 년 동안 사실만을 기록하고 진실만을 가르쳐야 할 초등학교의 교과서와 모든 백과사전 그리고 언론에서도, 왜곡되고 변질된 내용들을 걸러 내지를 못하고, 거짓되고 황당한 내용들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었다. 특히 허구의 장승제를 서울의 미래 유산으로 들먹이는, 서울신문의 특정 기사들은 눈을 뜨고는 읽어 볼 수 없을 정도로 황당하였다.

 

 

 

'장승배기'란 신라 21대 소지왕(炤知王)이 서기 487년 '역참(驛站)‘제도를 도입하여 큰길(官路, 國道)을 전문으로 안내하는 기능의 '돈대'(푯말)을 세웠던 곳을 뜻하며,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큰길'을 합리적으로 관리하고, 안내하기 위하여 5리(里) 또는 10리마다 나라에서 '장승'을 세웠던 자리를 '장승배기'(장승박이)라 하였다. 지금도 우리 땅에는 '장승배기'라는 옛터의 이름이 1,200여 곳에 남아 있다. ​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은 '장승'이 아니라, '벅수(法首)‘라고 불러야 옳은 표현이다. '벅수'란 마을과 성문(城門) 또는 '절집(寺刹)’을 지켜주는 '수호신'을 뜻한다. '장승'과 '벅수'는 서로의 역할이 다른 것이다. <연재 “일제가 왜곡한 ‘장승’과 ‘벅수’ 이야기” 1, 2편 참조>

 

동작구청이 주장하는 내용

 

1. 정조대왕의 어명으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처음으로 상도동의 '장승배기'에 세워 졌다.

 

2. 상도동의 '장승배기'는, 전국 '장승'의 우두머리격인 '대방장승'이 근무하였던 곳으로, 유적지다.

 

3. 정조대왕의 어명으로 세워진 '대방장승'은 판소리 '변강쇠타령'의 소재(바탕)가 되었고, '장승배기'란 지명의 근원이 되었다.

 

4, '일제강점기'때 '장승'이 강제로 철거당하였다.

 

모두 맞는 이야기일까?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주장들은 잘못된 것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하나하나 따져보기로 하자.

 

올바르게 고쳐져야 할 내용

 

1.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란 글씨는 정조대왕이 죽은 지 80여 년이 지난 개화기(1876~ )를 앞뒤로 하여,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을 하는 '벅수에 새겨진 글씨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상도동 장승배기는 조선시대 때에는 험준한 고갯길이었기에 길을 안내하는 기능의 장승이 세워져야 했고,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기능의 벅수라고 하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세워져야 할 이유가 없었다.

 

2. 판소리 변강쇠타령의 노랫말에 따르면 전국 장승의 우두머리격인 '대방장승'은 상도동 장승배기가 아닌 노량진의 노들나루 '장승배기'에서 근무하였다.

 

3. 장승배기란 지명의 유래는 신라시대부터였으며, 전국의 '큰길'(官路,國道)에 5리 혹은 10리마다 '길'을 안내하는 기능의 '장승'을 세웠던 자리를 '장승배기'라고 한다. 조사된 기록에 따르면 지금도 남한땅 1,200여 곳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4. '장승'은 1895년 '역참제도'의 폐지로 임무를 마치고 사라졌다. 역참제도가 폐지되고 15년이 지난 이후에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기에 이미 오래전에 소멸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장승을 또 다시 ‘강제로 철거하였다.’라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장승배기(長栍峴)에서 길을 안내하던 기능의 장승은 역참제도가 폐지(1895)되어 자연 소멸하였지만 예부터 마을을 지켜주던 수호신 기능의 벅수'(天下大將軍, 地下女將軍)가 세워져 있었던 서낭당(堂山)은 따로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물론 있다.

 

김두하의 책 《벅수와 장승(1990, 집문당)》에는 1936년 일제강점기 때 이 마을로 시집온 할머니의 이야기로 “상도2동 산28번지 85호 곽 아무개의 집 대문 옆에 장승이 서 있었었다>” 라는 내용이 보인다.(411쪽) 상도동 사람들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기능의 벅수를 장승으로 부르는 실수를 저질렀을 가능성도 있으며, 일제강점기 때의 '문화통치'에 협조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상도동 장승배기 주변에는, 또 다른 많은 장승배기가 존재하고 있었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때, 외국의 '선교사, 외교관, 상인들에 의하여 수집되어, 남 몰래 훔쳐간 장승들이 그들 나라의 박물관에서 속속 발견되고 있다.

 

 

상도동 장승배기는 정조대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정조는 1789(정조 13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경기도 양주의 영우원(永祐園)에서 수원의 화산 기슭 현륭원(顯隆園)으로 옮겨 새로이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1790년 《원행정례(園幸定例)》를 펴냈는데 그에 따르면 “해마다 현륭원 원행길에 임금을 모시고 원행했는데 정조는 한강의 노량주교를 건넌 이후 노들나루(상도동의 장승배기가 아님)에 있는 용양봉저정(노량행궁)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삼남대로'를 따라 만안현-금불암-남태령- 과천행궁을 거쳐 수원 화산의 현륭원을 참배하였다. ​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현륭원으로 옮긴 이후 13번 현륭원 행차를 했다. 그 가운데 6번의 행차, 낮에도'호랑'와'도'들이 출몰한다는 험준한 남태령 고갯길이 있는 삼남대로의 과천길로 다녀야 하는 불편을 겪었다. ​이에 불편함을 느낀 정조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위하여 과천길의 맞은편에 있는 시흥길을 정밀하게 조사를 한 이후 다듬고 넓히도록 명령을 하였다. 새로운 시흥길에는 상도동의 장승배기가 포함되어 있다.​

 

1794년 정조는 새로운 시흥길 토목공사를 위해 13,000냥의 자금을 확보하고 도로의 폭을 통일하여 24척(尺, 750cm, 1척=31,44cm)으로 넓히고 보수를 하였으며, 관아 건물을 새로 짓고 수리를 하는 대단위 공사를 시작하였다. 노량'과 신도시 화성(華城)을 잇는 넓은 신작로 가 닦여진 이후 1795년 서울과 수원을 연결하는 대동맥 '수원별로'가 탄생되었다.

 

이후 7번째 원행부터는 새로운 길 '시흥길'을 선택하여 '노량주교'를 건너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식사와 휴식을 가진 뒤 처음으로 '장생현'(상도동의 장승배기)을 지나 번대방평-문성동-만안교를 거쳐 '화성행궁'에 도착한다. 이때 '용양봉저정'과 상도동 '장승배기'와의 거리는 약5리(2km)다. 따라서 노량행궁을 출발하여 5리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상도동의 장승배기에서 또 다시 휴식을 취하여야 할 까닭이 없었다.​

 

정조는 13번이나 상도동 장승배기를 오고 갔지만 정조와 장승배기에 얽힌 이야기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정조가 상도동 장승배기에서 쉬면서 “이곳에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한 쌍을 세우라고 하였다.”라는 전설이 아닌 거짓말은 빨리 지워야 한다. 정조가 죽고 70여년이 지난 이후에 마을의 수호신으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라는 글씨가 우리땅에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30여 년 전부터 상도동 장승배기와 관련된 터무니없이 왜곡된 이야기들이 뒤범벅이 되어 초등학교 교과서와 참고서, 백과사전은 물론 어린이들의 동화책에도 왜곡되고 변질된 내용들이 셀 수 없을 만큼 소개되고 있다. 우리의 민속문화를 올바르게 공부하여야 할 우리의 어린 후손들이 안타깝기만 하다.

 

제발 동작구청 등 정부기관은 자라나고 있는 우리의 후손들 에게는 왜곡되고 변질된 역사는 바르게 고쳐서 제대로 알려야만 한다. 또한 그 잘못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만 하고 있는 우리의 민속학자들은 허수아비일 뿐이다. 제발 제 역할을 제대로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