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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5점짜리 개구쟁이가 대학교 교수 되다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10]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옛날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공부시키기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하였다는 “맹모삼천”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오늘까지도 우리들에게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지 않니?

 

나의 엄마도 네 자식을 홀로 키워야하는 중임을 떠메고 농촌에서 눈물겨운 고생을 꺾었었단다. 하지만 “자식은 공부시키고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늘 마음속에 간직했었다한다. 하여 애들의 장래를 위하여 농촌을 떠나 먼저 큰딸이 살고 있는 도문시에 갔다가 다시 연길시 공신에 이사를 하였다는구나! 공신이 연변대학과 가까워 좋다고 여겼지만 그때의 공신은 여전히 농촌이어서 안 되겠더란다.

 

하여 또다시 연길시 3중에 가까운 공원가에 이주하니 학생들도 많이 보고 아침이면 공원에 나가 공부도 할 수 있었기에 (그때 연길공원은 문표*가 5전이였는데 아침시간엔 표를 받지 않았고 학생들이 공부하는 장소로 되었단다.) 제일 좋은 곳이라 생각되어 오막살이일망정 우리에겐 고대광실로 여겨졌단다.

 

자식들을 위하여 세 번이나 이사한 엄마는 이 오막살이집에서 심혈을 기울여 최후로 자식들을 성장 시켰단다. 그중에서도 반급 꼴찌였던 100점제에서 5점을 맞던 둘째오빠를 대학교 교수로 성장시킨 엄마의 사랑이야기는 지금도 가슴을 울리고 있구나!

 

소학교에 다니던 나와 둘째 오빠는 엄마를 도와 가마스(그때는 초대 또는 가마니라고도 하였다.)를 짜서 연변1중에 다니는 큰 오빠의 숙사비 8원을 달마다 보내야 했었단다. 삼촌은 곤란하게 살고 있는 우리집에 오면 늘 “맏이만 공부시키고 둘째와 계집애는 소학교만 시켜라우.”고 하셨단다. 사실 그때 둘째 오빠는 철도 들지 못한데다 집에 와선 늘 가마스를 짜야 했기에 공부는 뒷전이었고 항상 반급의 꼴찌생이었다는구나.

 

한번은 100점제에서 5점을 맞고 와서도 “엄마, 난 오늘 5점을 맞았거덩……”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여 동네분들도 웃고 엄마도 너무 어이가 없더란다. 엄마는 “그래도 5점만큼은 알고 있구나! 다 내 잘못이다. 내가 너를 너무 등한시했구나! 우리 이제부터 더 노력하여 5점에서 50점으로, 50점에서 100점으로 노력해 보자꾸나!” 하시면서 오빠를 꼭 끌어 안아주셨다는구나!

 

 

옆에 있던 다른 집 엄마는 “공부 못 하면 농사일이나 시키지요. 엄마는 머 죽을게야.” 하는데 엄마는 또 “아니요. 형님, 내 잘못이 크오.” 하였단다. 그 뒤 몇 달 후에 오빠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게 되였는데 역시 락방되었단다. 그때엔 농촌소학교에서 해마다 5~ 6명 정도 밖에 중학교에 못 가던 때인지라 꼴찌생인 오빠는 원래 어림도 없었단다.

 

사실 우리집 형편에서 큰 오빠만 공부시켜도 엄마는 성공하였다 할 것이었지. 그러나 “밥은 빌어먹어도 자식은 공부 시킨다.”, “소를 팔아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우리 백의민족의 신념이 엄마에게 있었다는구나! 그러나 동네의 어떤 분들은 “쇠궁둥이*나 두드리게 되였구나!”. “집에서 가마스나 짜서 형님이나 공부시켜라.”라 하였지만 엄마는 이런 서리리* 맞은 말도 귓등으로 흘러 보내고 오빠에게 책가방을 메워 15리 밖에 있는 복습반에 데리고 가서 입학시켰단다.

 

“하면 못 할 일이 없지.”라는 엄마의 엄격한 말씀에 오빠도 날마다 도시락을 싸들고 왕복 30리 길을 걸어 다니면서 공부하고 저녁이면 또 엄마를 도와 가마스를 짜야했단다. 그러나 꼴찌생이 그렇게 빨리 제고될 리 만무하였지, 하여 오빠는 다음해에도 또 그 다음해에도 락방되여 앉은 석동이* 신세가 되였단다. 오빠는 울먹거리며 엄마에게 “엄마, 미안합니다. 난 아무래도 안 되겠는데 어쩌지?”

 

엄마는 웃으시며 오빠를 보고 “너 미안한걸 아는 것 보니 인젠 되겠다.”, “옛날에 석자깊이의 얼음도 하루아침에 얼지 않았다는 말이 있더구나. 둘째가 사람이 되였구나! 한번만 더해보자꾸나!”하시였단다.

 

이렇게 되여 오빠는 또 다시 책가방을 메였단다. 엄마는 오빠에게 지각 한번 결석 한번 못 하게 하였고 엄격한 요구로 또 자신의 모범행동으로 자식을 감화시켰단다. 늘 단정하게 흰저고리에 검은색 치마거나 검은색 몸뻬(바지)를 입으신 엄마는 일터에선 공수가 제일 높은 소수레몰기*, 후치질*, 비료끄기*에서 앞장섰단다.

 

엄마는 또 오빠에게 “너는 꼭 중학교에 입학해야하고 나도 이제부터 문맹퇴치하겠으니 노력해보자”고 하였단다. 엄마는 집에다가 가마스 손틀하나 혼자 짜는 숙탁기* 하나 장만하여 시간을 쪼개어 가마스도 짜면서 칠성별*을 이고 일어나 온종일 눈코 뜰새 없이 보내시었단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이듬해 오빠는 끝내 중학교에 입학하였단다.

 

세월이 흘러 엄마도 문맹퇴치하여 소학교 4학년 졸업장을 받았고 오빠는 또 우수한 성적으로 조양천중학교 고중반에 입학하였단다. (그해에는 그 학교에 고중반을 초생*하느라 필업생*을 다른 학교에 보내지 않았단다.) 집생활은 쪼들릴 대로 쪼들렸지만 엄마는 아들이 일반고중에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룡정고중 교장을 찾아가 개별시험*을 치게 하였다는구나! 집에서 학교로 다니면 경제부담은 덜겠으나 엄마는 끝내 오빠를 룡정고중에 전학시켜 몇 달은 이모집에 있게 하다가 다시 숙사생활을 시켰단다.

 

경제 압력도 엄마의 결심을 꺾지 못하였단다. 엄마는 또 혼자서 자식들의 공부를 위하여 연길시에 이주하여 오막살이집에서 살면서 량식창고*의 마대치기*, 식당일…… 등을 억척스레 하면서도 다시 “집”을 꾸려 외지에 있던 둘째오빠와 나를 연길로 전학시켰단다. 돈도 없고 그 무슨 관계망도 없는 한 농촌부녀인 엄마는 자식들의 학습을 위하여 세 번이나 이사하였고 자식을 위하여 이 학교 저 학교에도 뛰어다녔으며 학교 교장도 찾았다는구나. 역시 시대가 좋고 정책이 좋아 엄마는 돈한 푼 없어도 애들을 전학도 시켰다는구나.

 

그제날* 5점짜리 개구쟁이 꼴찌생이 훗날 대학교교수로, 나라의 인재로 된 옛말 같은 이야기는 잊히지 않는구나! 오늘도 엄마의 아름다운 사랑에 흠뻑 젖는다.

 

 

< 연변말 풀이 >

 

* 문표(門標) : 입장권

* 쇠궁둥이 : 소 엉덩이

* 서리리 : 찬 서리가 어리다. 여기서는 서운한 말을 가리킴

* 석동이 : 연변속담 "앉은 석동이", 학교서 윗학년에 진급하지 못하고 3년째 유급한 아이. 발전 없는 아이.

* 후치질 :여름철 밭곡식 북을 돋구는 작업

* 비료끄기 : 셔울철 가축의 언 똥을 쳐내는 일

* 숙탁기 : 가마니를 짜는 기계

* 칠성별 : 북두칠성, 새벽에 뜨는 별

* 초생(招生) : 학생 모집

* 필업생(畢業生) : 졸업생

* 개별시험(個別試驗) : 따로 치는 시험

* 량식창고(糧食倉庫) : 쌀창고, 곡간

* 마대(麻垈)치기 : 마대 옮기는 노동

* 그제날 : 옛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