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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잔 기교로 재주를 탐하지 마라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417]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일제시대, 경기소리의 대가였던 주수봉은 묵계월을 약 2년여 가르치면서 그녀의 재주가 범상치 않음을 발견하고 자신보다 더 유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최정식 명창에게 보냈다는 점, 최정식은 학강(鶴崗) 최경식의 수제자로 이름을 떨치던 명창이었으며, 학강은 당시 서울의 소리선생들이 배웠다고 하는 큰 명창이었다는 점을 얘기했다.

 

또 최경식의 윗대가 장계춘, 그 윗대가 추, 조, 박으로 알려진 추교신, 조기준, 박춘경 등이니 묵계월의 소리는 경기소리의 정통파 계보라는 점, 묵계월은 당일 배운 소리를 그날로 완전히 암기하고 자신있게 부를 때까지 밖에 나오지도 않은 노력파라는 점, 그의 소리는 강약과 명암의 대비로 음빛깔이 다르고, 음폭이 크며 역동적인 고음(高音)과 저음의 안정감이 일품이라는 점, 송서(誦書), 삼설기(三說記)를 배워 송서의 단절 위기를 막았다는 점 따위를 이야기 하였다.

 

고 묵계월 명창은 소리 잘하는 명창으로 이름이 났거니와 또 다른 면으로는 인간적으로도 친근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따뜻하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명창이었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간혹, 그의 제자들이 스스럼없이 스승을 회고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평소에는 과묵한 분이었으나 불의에는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정도로 강한 성품의 소유자로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처럼 따뜻한 모성애로 다정다감하였으며 특히 어렵고 힘든 이웃에는 눈물을 보이는 소녀같은 순수성을 간직했던 명창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현 경기도 경기소리의 예능보유자인 큰 제자, 임정란은 그의 스승 묵계월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선생님은 소리를 지도해 주실 때는 매우 엄격한 스승이었지만, 수업이 끝나고 나면, 마치 어머니 같이 생선탕도 끓여주시고, 냉면도 사 주시던 따듯한 분이셨지요. 함께 무대에 서는 날이면 선생님도 무척 긴장하셨어요. ‘평생을 한결같이 소리와 함께 하셨는데 무슨 걱정이 있으신가요? 저희들이 문제이지요.’라고 말씀드리면 ‘글쎄 말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눌 길 없으니 어찌하면 좋으냐’, ‘참으로 어려운 것이 소리로구나’ 하시면서 미소를 짓던 소녀같은 명창이셨어요.”

 

매사 신중하게 접근하고, 음악인으로서 최선을 다하려는 그의 태도나 정신을 후배 명창들을 비롯한 젊은 국악인들이 이어받기를 기대한다.

 

묵계월의 겸손하고 따뜻한 자세는 음악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듯 보인다. 그의 소리는 외양(外樣)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즉흥적인 표현을 일삼기보다는 정확한 발음이나 발성, 장단, 등의 기본기가 충실하다는 점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묵 명창의 지도를 받은 제자들은 잔 기교로 재주를 탐하기 보다는 소리의 기본을 충실하게 다지는 노력을 해 왔다고 입을 모은다.

 

 

생전의 명창은 수없이 많은 나라안팎 공연활동, 방송이나 음반을 통한 보급활동, 교육을 통한 경기소리의 확산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해 온 분이었다. 그 많은 공연물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무대는 자신의 고희기념 공연이었던 <인생70, 소리60>, <묵계월 1995, 끝없는 소리길>, <묵계월, 경기소리 및 삼설기 발표회> 등등이다.

 

이러한 공연 기획물들은 지금도 많은 민요 애호가들에게 그의 소리세계를 전하고 있다. 특히 지방에서, 혹은 나라밖에서 그에게 소리를 배우러 오는 학생들에게는 더욱 애정과 관심으로 열성을 다했는데, 한국 민요의 아름다움을 더욱 널리 보급한다는 차원이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중국 연변예술대학을 방문했을 때, 민족 성악을 지도하고 있던 김순희 교수도 묵계월 명창의 제자였다. 김 교수는 한국에 와서 여러 해 동안 그의 지도를 받았는데, 지금은 대학에서 민족의 성악을 열심히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경기민요의 확산 운동은 이미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있는 듯 보인다. 최근의 유튜브를 열어보면 미국의 공영방송, NPR이라든가 워싱톤의 케네디 센터에서도 한국의 젊은이들이 경기민요 가락을 중심으로 다른 장르와의 협연이나 공연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경기민요를 대하는 외국인들의 표정이 매우 재미있다. 신선한 충격과 경탄 그 자체로 보이기 때문이다.

 

 

묵계월 명창에겐 훈훈하고 잔잔한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많은데, 가난한 제자들과 숙식을 함께 해 온 미담이라든가, 미국 UCLA 한국음악부가 재정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방일영 국악상에서 받은 상금 절반을 쾌척한 일 등은 동포사회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남다른 일화라면 일찍이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자리를 스스로 용퇴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는 사실이다. 경기소리를 부르며 평생을 살아온 노명창이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면서 국가가 맡긴 소임을 충실히 할 수 없다는 게 용퇴 이유였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나 좋다고 마냥 보유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 없다”는 양심고백이다. 마치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스승과 함께 했던 무대는 그에게 배움을 청했던 제자들이 마음을 담아 추모음악회로 채우고 있다. 임정란을 위시하여 최근순, 임수현, 정경숙, 최은호, 김경아, 이명희, 남은혜, 이윤경 등의 큰 제자들이, 그리고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1호 <경기소리> 및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의 이수자, 전수자 및 장학생 등 60여명이 함께 무대에 올라 묵계월 류의 소리로 그가 떠나간 길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