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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돈키호테와 다람살라 방문기

달라이 라마 망명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비슷

한국의 돈키호테와 다람살라 방문기 (7)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귀향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합창이 끝나고 달라이 라마가 퇴장한다. 옆과 뒤에는 붉은 가사를 입은 승려들이 따랐다. 경호원들도 뒤따랐다. 사원의 서쪽에 달라이 라마의 숙소 건물이 있다. 달라이 라마가 법당에서 걸어 나오자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를 보려고 몰려왔다. 달라이 라마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고, 인사를 나누고, 말을 걸기도 하면서 아주 천천히 퇴장하였다. 다행이 우리는 달라이 라마가 퇴장하는 경로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의 손을 잡아보지는 못했지만 얼굴은 뚜렷이 볼 수가 있었다. 그의 얼굴은 인자해 보였다. 근엄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는 이제 누군가 옆에서 부축해야 하는 노인이었다. 그는 1935년 생이니 올해로 만 84세가 되었다. 세월의 흐름은 티베트의 위대한 종교 지도자라고 해서 피해가지는 않았다. 지구가 한 해에 한번 해를 중심으로 크게 도는 순환 운동은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이 피할 수가 없다. 지구가 해를 돌면서 세월이 계속 흐르고……. 그도 이제는 기력이 쇠할 나이가 된 것이다. 그도 머지않아 죽고 오늘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날이 올 것이다.

 

달라이 라마가 먼저 퇴장하고 이제는 사람들이 퇴장하는데 법당과 마당은 물론 사원의 곳곳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병산과 나는 들어온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퇴장하였는데,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서 떠밀리듯 움직였다. 그렇게 많은 인파는 처음 본다. 처음에 청중의 수를 5,000명으로 추산했는데, 나오면서 보니 그보다는 훨씬 많은 것 같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티베트 사람들과 인도에 사는 티베트 사람들이 곳곳에서 4일간 진행된 법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모여 들었을 것이다. 사원 정문 앞을 통과해야 우리가 머무는 숙소로 갈 수 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아주 천천히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한 인파였다.

 

숙소에 도착한 뒤에 내가 오늘 본 달라이 라마의 조국 티베트에 대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은 정보가 나온다.

 

티베트는 거대한 산맥으로 둘러싸인 티베트 고원에 자리 잡고 있다. 티베트 고원의 평균 고도는 4,500m나 되므로 흔히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린다. 만년설로 뒤덮인 산봉우리들과 바위능선을 숲이 둘러싸고 있다. 4개의 큰 강들: 브라마프트라강, 인더스강, 메콩강, 그리고 황하가 티베트에서부터 발원한다.

 

티베트 면적은 원래는 한반도 12배 크기의 광활한 넓이였는데, 1950년에 중국이 침공한 이후 1965년에 경계를 재설정해서 티베트 면적의 반절을 청해성, 사천성, 운남성으로 편입시켰다. 축소된 티베트의 공식 명칭은 서장(西藏)자치구이다. 서장자치구의 면적은 1,228,400km2 (한반도의 6배)이고 인구는 2017년 추계로 337만 명에 불과하다.

 

 

티베트는 고도가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농토가 적어 물자가 부족하고 야크를 기르는 유목민이 많다. 주식으로 짬파라고 불리는 보리 가루를 차에 개어 먹고 추위를 이기기 위해 야크 버터차를 마시면서 오랫동안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유지하였다.

 

티베트인들은 대부분 불교를 믿으며, 종교의 힘을 바탕으로 영혼의 행복을 추구하며 소박하게 살아왔다. 티베트 불교는 대승불교의 한 종파로서 밀교라고도 한다. ‘라마교’라는 호칭은 라마를 믿는 불교라는 뜻으로 티베트 불교를 비하하는 용어여서 잘 쓰지 않는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몽골이 티베트를 점령한 적이 있는데, 이때에 오히려 티베트 불교가 몽골로 전파되고 후에 원나라의 국교가 되었다.

 

티베트의 수도는 라싸인데, 달라이 라마의 궁전이었던 포탈라 궁이 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최고 통치자를 말하는데, 티베트 인들은 이전의 죽은 달라이 라마가 다시 태어나서 계속 달라이 라마가 된다고 믿고 있다. 현재의 달라이 라마는 제14대인데, 1959년에 티베트를 떠나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 600만의 티베트인이 살고 있다.

 

 

티베트의 역사에 관하여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티베트와 중국과의 관계는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8세기에 티베트인들은 진나라의 옛 서울을 점령할 정도로 강성한 적도 있었다. 지형이 험준하여 외세의 침입이 어려운 티베트는 2,000년 이상 독립 문화권을 유지하였다. 14세기까지 중국에서는 이 지역을 토번(吐蕃, 투베트)국이라고 불렀다. 청나라 때에 청의 보호국이 되었다. 19세기에는 인도를 통치한 영국의 세력 하에 들어가 1904년에 영국군이 라사에 주둔했지만 티베트 전체를 지배하지는 못하였다. 중국 역시 티베트를 중국 영토로 여기고 있었지만 종주권 주장만 할 뿐이었다.

 

달라이 라마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중립 정책을 유지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나자 달라이 라마는 인도와 중화민국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티베트의 주권을 확립하려 시도했지만 중국의 반대로 실패했다. 1949년에 장개석 군대를 무찌르고 중국을 통일한 모택동은 1950년에 4만 군대를 보내어 티베트를 합병하였다. 당시 국제 사회의 관심은 한국 전쟁에 쏠려 있었기 때문에 티베트 문제는 외면당했다.

 

1959년에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으나 중국은 군대를 보내어 강경 진압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달라이 라마는 이때 라사를 떠나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라다크 지방을 거쳐서 인도로 망명하였다. 당시 인도의 수상이었던 네루는 달라이 라마를 받아들이고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데에 협조하였다.

 

오늘 수많은 티베트인들의 초라한 모습을 본 나는 100년 전의 우리나라로 되돌아가는 상상을 해 보았다. 시간을 1919년으로 되돌려 보자. 제국주의 일본이 1910년에 조선을 병합한지 9년이 지났다. 1919년 3월 1일 비폭력적인 만세 운동이 한반도를 뒤흔들었다. 이어서 일제의 악랄한 탄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옥사하고 사형 당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용정으로 연변으로 또는 사할린으로 상해로 망명을 떠났다. 그들 중 일부는 독립군에 가담하여 총을 들었을 것이다. 조국을 떠나 남의 나라에 망명하여 사는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 내가 오늘 오전에 본 수많은 티베트인들의 가난한 모습과 비슷했을 것이다.

 

중국의 상해시에 1919년 4월 11일에 망명 임시정부가 만들어졌다. 당시의 임시정부는 현재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의 망명 정부와 비슷했을 것이다. 100년 전의 조선과 관련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나는 망명생활을 한 우리 선조들의 후손인 조선족들을 잘 대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들이 비록 돈을 벌러 대한민국에 들어와서 험한 일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선조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총을 들거나 독립군에게 독립자금을 전해준 망명객이었다. 그들의 선조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현재의 우리나라가 존립한다고 생각된다. 그처럼 훌륭한 선조들의 후손인 조선족들을 진심으로 잘 대해주어야 할 것 같다.

 

병산과 나는 법회가 끝나고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병산이 호텔 옆 음식점에서 점심 식사를 하자고 제안하였다. 식당은 4층에 있었는데 전망이 좋았다. 식당에서 히말라야산맥이 뚜렷하게 보였다. 병산은 인도에서 오래 동산 순례길을 걸었기 때문에 인도 음식을 잘 알았다. 길쭉한 쌀에 두 가지 소스를 부어 먹는 음식을 주문하였다. 나는 어느 음식이나 잘 먹는 여행 체질이기 때문에 점심 식사를 맛있게 잘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