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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돈키호테와 다람살라 방문기

달라이 라마, 죽으면 환생하지 않겠다고 선언

챔파꽃을 닮은 로자 씨 만나다
한국의 돈키호테와 다람살라 방문기 (12)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티베트 불교는 크게 두 세력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관세음보살의 현신인 달라이 라마를 추종하는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아미타불의 현신인 판첸 라마를 추종하는 세력이다. 달라이 라마의 추종자들은 1959년에 인도 다람살라로 망명했다. 그러나 판첸 라마의 추종자들은 중국 공산당과 타협해서 지금도 티베트에서 종교 활동을 하고 있다.

 

2019년은 달라이 라마가 망명한 지 60돌이 되는 해이다. 티베트 망명 정부는 2018년 초에 뉴델리에서 인도 망명 60돌 사전 기념행사를 대규모로 열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력을 의식한 인도 정부가 반대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행사 장소를 다람살라로 옮겨야 했고 인도 정부의 주요 인사 대부분은 이 행사에 불참했다. 최근 인도 정부가 티베트 망명 정부와 거리를 두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달라이 라마에게 고민거리이다.

 

달라이 라마는 2014년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기가 죽으면 환생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달라이 라마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환생자를 공인할 승려(판첸 라마)가 필요한데 중국이 지명한 현재의 판첸 라마를 티베트인들이 인정하지 않으므로 환생 제도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인 2019년 3월에 미국의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달라이 라마는 “내가 세상을 떠나면 15대 달라이 라마는 무신론자인 중국 공산당이 지정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600만 티베트인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중국 정부가 지정하는 달라이 라마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환생자를 찾아 권력을 이양하는, 세계사에서 독특한 이 제도가 14대 달라이 라마의 사후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단할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지켜볼 뿐이다.

 

 

 

 

사원을 혼자서 세세히 둘러본 후 나는 호텔로 돌아왔다. 낮 3시쯤 되자 병산이 3시 30분에 사원 근처 찻집에서 인도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을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같이 가겠느냐고 묻는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인도에서 16년 동안 살고 있는 여자 목사님’이라고 대답한다. 나는 여자 목사님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불교에는 비구니 스님이 많고, 천주교에는 수녀님이 많지만 기독교에는 여자 목사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적다. 내가 젊었을 때에 ‘기독교 환경운동 연대’라는 단체에 가입하여 3년 정도 활동한 경험이 있는데, 그 때에 난생 처음으로 여자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 분은 대하소설 <혼불>을 써서 유명해진 여류 작가 (고) 최명희와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는데, 매우 활달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우리나라 목사님들은 모두 남자인데, 인도 다람살라에 와서 여자 목사님을 만난다니 호기심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병산에게 “그 여인을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라고 물어보니, 다람살라에 도착한 후 한국 음식점을 찾아가 식사를 하다가 우연히 만났다고 한다. 병산이 붙임성이 있어서 언제 어디서나 사람을 잘 사귀는 것은 병산이 가진 수많은 장점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친구들 말을 들어보면 나도 사람을 잘 사귀는 편에 속한다.

 

오후 3시 30분에 사원 근처 골목길에 있는 ‘카페 부단’이라는 간판이 붙은 작은 찻집에서 병산과 함께 여자 목사님을 만났다. 척 보니 눈웃음을 웃으며 서글서글한 인상을 주는 젊은 여인이었다. 목소리도 뚜렷하고 심지가 곧아서 대화하기에 편했다. 대화하면서 자세히 보니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젊어서부터 미인 소리를 들었음직한 그런 모습이었다.

 

눈썹은 까맣게 그려져 초승달처럼 고옵고, 눈망울은 히말라야 설산 아래 호수처럼 맑으며, 검은 머리칼은 향유를 바른 듯 향기로웠다. 웃을 때에 들어나는 하얀 이빨과 붉은 입술이 잘 어울렸다. 인도의 사리를 두른 모습이 열대의 챔파꽃(타고르 시에 나오는 꽃으로 미국에서는 풀루메리아, 러브하와이 등으로 불린다) 같은 인상을 주며, 전체적으로 은은한 매력이 향내처럼 풍겨 나오는 그런 여인이었다.

 

나는 나이를 30대 정도로 보았지만, 여자 나이는 일급비밀이라는데 물어볼 수는 없고... 나중에 병산에게 살짝 물어보니 고등학생 딸이 있는 40대란다. 그 여인은 어느 정도 대화가 진행되자 자기를 로자(Roja)라고 불러달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하 ‘로자 씨’라고 부르겠다.

 

 

로자 씨는 한국에서 태어나 서울의 서대문 사거리 근처에 있는 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까지 받았으니 정식 목사님이다. 로자 씨는 신학교를 다닐 때 인도에서 신학 공부하러 유학 온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혼인을 했다. 혼인 뒤에 남편 따라 인도의 델리로 이사 와서 16년째 살고 있다. 인도로 이주한 당시만 해도 델리에는 학교에 가지 않는 가난한 아이들이 많았다.

 

로자 씨 부부는 델리의 빈민가에 대안학교를 세우고 주변의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유치원과 초등학교 교육을 시켰다. 대안학교의 이름은 희망학교(School of Hope)라고 한다. 내가 짐작컨대 가난한 동네에서 대안학교를 운영하면서 부차적으로 기독교 선교 활동을 하는 것 같다. 희망학교 졸업식 사진을 보았는데 뒤편에 커다란 예수님 초상화가 보인다. 로자 씨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5살 때부터 꿈이 선교사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로자 씨는 현재 인도에서 어렸을 때부터 간직했던 꿈을 이루며 잘 살고 있다.

 

인도에서 로자 씨의 공식 직함은 선교사가 아니고 희망학교 교장이라고 한다. 로자 씨는 설립자이자 교장으로서 인도인 교사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대안학교를 운영해 오다가 얼마 전에 정식 학교로 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교장 자리를 인도인에게 물려주고 자기는 한직인 교감으로 물러났다고 한다. 16년 동안 열심히 일하다 보니 에너지가 고갈된 느낌이어서 모처럼 다람살라에 휴양하러 왔다고 한다. 숙소는 호텔 대신 값이 싼 게스트하우스를 얻었는데, 다람살라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몇 주 동안 푹 쉬었다 갈 계획이란다.

 

로자씨 는 힌두어를 잘하고 인도의 정치, 경제, 종교, 문화를 잘 알고 있는 인도 전문가이었다. 신학대학 다닐 때에 학생회 간부로 활동도 했고, 민주화 운동에 동참해서 시위 한 경력도 있었다고 한다. 과거에 의식 있는 신학생이어서 그런지 현재 한국의 정치, 경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당시에 시위할 때에 풍물놀이가 유행이었는데, 로자 씨는 장구를 배웠다고 한다. 평창에 살면서 뒤늦게 취미로 장구를 배우고 있는 나로서는 반가웠다. 로자 씨와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주제가 많이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