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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충혈된 광해군의 눈, 안질이냐 광폭해서냐?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108]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문화재청은 6월 25일 《조선왕조실록》 96책을 확인해 국보로 추가 지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번에 추가로 국보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 가운데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도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들은 모두 《성종실록(成宗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처럼 임금 이름 뒤에 ‘실록(實錄)’이란 말이 붙어 있지만 유독 광해군은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처럼 뒤에 ‘일기(日記)’라는 말이 붙어 있지요. 이는 왕자 때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조선시대 내내 임금으로 인정받지 못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광해군일기》는 단 두 권만 완성본으로 제작되었고, 특이하게도 중간수정본도 남아 있지요. 따라서 중간 수정단계에서 어떤 부분이 고쳐졌거나 지워졌는지 알 수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의 활약상이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황급히 의주로 도망을 갑니다. 이때 왕세자였던 광해군은 분조(分朝) 곧 임시정부를 이끌어 황해도와 함경도, 전라도 일대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며 백성과 병사들을 격려하며, 민심수습에 크게 공헌하였고 이 덕분에 온 나라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중요한 기록을 지워버린 것입니다.

 

이는 광해군이 쫓겨난 뒤 승자들에 의해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완전히 뜯어 고쳐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한 예를 보면 중간수정본에는 “광해군이 안질이 있어 눈이 충혈되었다.”가 완성본에서는 “광해군은 성질이 광폭해서 눈이 붉어졌다.”처럼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 새롭게 조명되는 얘기들을 보면 광해군은 대동법을 시행해 가난한 농민 대신 땅을 가진 지주들에게 세금을 쌀로 내게 하는 개혁을 실천한 임금이었고, 명과 후금 사이에 절묘한 외교정책을 펴는 등 기록과는 달리 꽤 괜찮은 임금이었음이 드러나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