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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7월의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

러시아를 무대로 항일투쟁에 나섰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이천만 동포는 다 최후의 일인이 죽을 때가지 독립을 도와 이루게 할 줄로 확신하노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 이하 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이동휘(1873.6.20.~1935.1.31.)선생을 2019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뽑았다.

 

 

1873년 6월 20일 함경남도 단천에서 빈농의 아들로 출생한 선생은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1905년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운동에 헌신하였다. 이후, 대중을 자각시켜 구국운동에 나서게 하기 위해 교육문화 활동을 펼치는 한편, 기독교야말로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라는 신념에서 기독교 전도활동에 힘썼다.

 

선생은 서북학회(西北學會)와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의 지도자로서 구국운동을 펼쳤으며, 1911년 3월 안명근ㆍ양기탁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총감부에 체포되었고, 인천 앞 바다에 있는 무의도에서 1년 동안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1912년 6월 유배에서 해제된 선생은 1913년 2월경 압록강을 건너 북간도로 탈출하였다. 선생은 북간도 한인자치기관인 간민회(墾民會)를 지도하는 한편, 북간도 각지를 순회하며 신교육 보급과 기독교전도활동을 계속하며 동포사회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드높였다.

 

러일전쟁 10돌이 되는 1914년에는 제2의 러일전쟁 발발에 대비하여 항일광복전쟁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선생은 만주와 러시아의 민족운동세력을 규합한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조직하였으며, 북간도 왕청현 나자구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였다.

 

1918년, 선생은 하바로브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ㆍ유동열ㆍ김립ㆍ오성묵ㆍ오와실리ㆍ이인섭 등 동지들과 첫 한인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 발행, 군사학교 설립, 일본군병사들을 상대로 한 반제반전(反帝反戰)선전, 한인적위대 조직 등을 추진하였다

 

선생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에 취임하였고, 상해임시정부는 선생을 비롯한 주요 각원들이 취임함으로써 지지기반이 훨씬 확대되었으며, 독립운동 최고기관으로서의 권위도 확립되었다.

 

선생은 안정된 체제에서 방안을 찾는 정치가라기보다는 혁명적 방법에 의해서만이 조국광복을 달성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녔던 진보적 민족혁명가였다. 특히, 조국광복을 위한 일이라면 모든 일에 앞장서서 나서야마는 선생의 진보적 행동성과, 전통적인 권위와 사회적 제약을 과감히 개혁코자 했던 혁명성은 다른 사람들의 추종을 불허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