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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아라홍련’과 700년만의 사랑

이인화의 사랑법과 테니슨 식의 사랑법
[솔바람과 송순주 5]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지다이(영주)의 장례식이 끝난 어느 날이었다. 아수친마님(박씨부인)에게 지출장부를 들고 왔던 안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수친의 얼굴이 굳어졌다.

 

“박연폭포가 떨어지던 고모못을 잊었습니까? 이렇게 가을바람이 불면 젊은 부부들이 채련가(採蓮歌)를 부르며 연밥을 따지 않았습니까? 연꽃은 붉고, 연잎은 넓적하고 연밥은 많고 많았지요. 나는 노를 잡고 당신은 소쿠리를 들고 연잎 속으로 배를 저어 가지 않았습니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가요?”

 

“저는 아직도 돌아오는 돛대에 어리던 그 달빛이 눈에 선합니다. 아내가 부르던 채련가도 전부 기억할 수 있습니다. 아내는 예뻤고 노랫소리도 곱고 빼어났지요. 요즈음도 잠자리에 누우면 그 노래가 귓전에 들립니다. 그러면 연뿌리 끊기듯 애간장이 끓고 연밥알인양 눈물이 방울방울 흐릅니다.”

 

 

왜 이 구절이 다시 생각나는 것일까? 경남 함안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연꽃 씨앗이 700년 만에 꽃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생각난 것은 소설가 이인화가 쓴 《시인의 별(부제:채련가, 주석 일곱 개)》라는 소설의 이 구절이었다. 2000년 제24회 이상문학상의 당선작이다.

 

가야문화재연구소가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사적 67호)터에서 이 산성을 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옛 연못의 퇴적층으로 추정되는 지하 4~5미터의 토층을 발굴하던 중 10개의 연꽃 씨앗이 나왔다. 이 10개의 연꽃 씨앗 중에서 표본 2개를 골라 함안군이 대전과학단지 내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박중헌 박사에게 의뢰한 결과, 1개는 지금으로부터 650년 전, 나머지 1개는 760년 전의 고려시대 것으로 확인했다. 다시 말하면 고려시대 연꽃이 진흙 속에 묻혀서 썩지도 않고 남아 있다가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진귀한 연꽃 씨앗이 나오자 함안군은 곧바로 씨앗 담그기에 들어갔고, 씨앗은 5일 만에 싹을 내기 시작해 그 달 13일에 첫 번째 잎이 나온 뒤에 8월 하순까지 여러 개의 잎이 나오는 등 정상적인 성장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후 다시 2포기로 나누어 심자, 지난달 20일 첫 꽃대가 출현했고 드디어 7월 7일에 두 송이의 연꽃이 빨간 모습으로 자태를 드러낸 것이다.

 

함안지역은 그 옛날 아라가야. 그래서 이 연꽃은 ‘아라홍련’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어떤 이름이든 이 연꽃은 고려시대에 바로 이 일대 연못에서 피던 그 연꽃이 700년 만에 환생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작가 이인화가 어느 도서관 구석에 잠들어 있는 숨은 기록을 찾아낸 것과 묘하게 일치한다. 그 아리아리한 이름의 ‘아라연꽃’의 개화 소식을 접하자 말자 바로 이 소설의 이 구절이 생각난 것이다.

 

소설 《시인의 별》은 영원한 사랑 이야기이다. 작가는 도서관 어느 구석에 잠들어 있는 숨은 기록을 들추어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고려가 몽골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충렬왕 때, 안현이라는 청년이 살았다. 그는 시를 열심히 공부했고 과거도 합격해 벼슬길도 열렸지만 뒷줄이 없어 설 자리가 줄어들어 가난한 시인으로 살았다. 기쁨이라면 예쁜 딸이 원나라에 공녀에 끌려갈까봐 높은 벼슬을 한 박 씨라는 노인이 자기 딸을 그에게 시집보낸 것이었다. 부인은 착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처가는 망했고 먹고 살 길이 없는 안현은 대청도라는 섬의 역참관리라는 아주 낮은 벼슬을 맡아 부인과 함께 대청도로 건너간다.

 

그런데 이 섬에 원나라 쿠빌라이의 여섯째 아들 이아치가 하필이면 그가 있는 대청도로 유배되어 온다. 여색을 심히 밝히는 망나니였던 이아치는 안현의 아내를 보자 그를 뺏기 위해 집요하게 덤빈다. 안현은 아내와 함께 섬을 탈출하다가 붙잡혀 아내는 뺏기고 그는 죽도록 얻어맞아 거의 병신이 된다.

 

딸을 빼앗겼다는 소식에 처가는 엉망이 되고 안현도 아픈 몸을 추스르지 못하다가 그의 아내를 찾기 위해 몽고 벌판으로 길을 떠난다. 온갖 고생 끝에 어느 축제장에서 지다이 영주의 부인이 되어있는 아내를 발견하고는 그 밑에 서기로 숨어들어가지만 아내는 모른 체 한다.

 

아내의 현 남편인 지다이 영주는 몽고의 권력다툼 속에서 영지를 뺏기고 쿠빌라이 밑에 들어가 있다가 영지를 빼앗긴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이 때 안현은 자신의 아내에게 접근하지만 아내는 자신의 아들을 성인으로 키워야 한다며 고려로 돌아가는 것을 거절한다. 그 때 아내에게 고려로 돌아가자고 호소하는 광경이 바로 맨 앞에서 인용한 바로 그 장면이다.

 

이 세상에서 오직 그녀만이 가슴 속에 살아있는 별이 되어 그의 삶을 지탱해주었지만 그 아내는 벌써 현실 속에서 다른 사람의 아내, 다른 사람의 엄마가 되어있었다. 안현은 꿈속에서 고려를 찾아간다. 꿈속에서 장인과 장모는 웃으면서 사위를 맞는다. “안서방, 어서어서 연밥 따세나…….” 장인은 웃고 아내는 자신의 팔을 끌었다. 정녕 꿈이었다. 그날 밤 안현은 자신의 아내였던 아수친의 천막으로 간다. 먼동이 틀 무렵 아수친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안현의 손에서는 피 묻은 칼이 발견되었다.

 

함안에서 700년 만에 고려시대 연씨가 꽃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한 날이 공교롭게도 양력 7월 7일이다. 음력이 아니라 양력이지만 7월7일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연인들이 하늘에서 다시 만나는 날, 그 고려시대 연꽃을 보며 이인화가 다시 살려낸 고려시대 채련가, 거기에 나오는 안현과 그의 아내 아수친의 한 맺힌 사랑이야기가 오버랩 되는 것이다.

 

이런 동양식의 사랑이야기와 대조되는 것이 《이녹 아든 Enoch Arden》이라는 담시(譚詩: 이야기식으로 풀어간 시)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1892)이 1864년에 발표한 애끓는 사랑이야기이다.

 

 

벌써 백 년도 더 되는 오랜 옛날

바닷가에는 집이 세 채, 아이들이 셋

귀여운 애니 리라는 소녀와

방앗간집 외아들 필립 레이,

어느 추운 겨울날 배가 난파하여

아버지를 여읜 이녹 아든이 그들이었죠......

 

이렇게 2명의 소년과 한 명의 소녀가 자연스럽게 같이 자라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담시는, 곧 이녹 아든과 애니 리의 결혼과 출산, 그리고는 남편 이녹이 돈을 벌기 위해 배를 타고 멀리 나갔다가 풍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10년이 지나고 초조히 아이들과 함께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애니에게 어릴 때부터의 친구이며, 언제가 그녀를 사모해 온 필립이 비로소 청혼을 한다. 애니는 1년 동안의 고민 끝에 결국엔 필립과 결합을 하고 필립은 이녹의 아이들을 거두어 새로 낳은 아이와 함께 재미있게 산다.

 

그 때서야 고향에 돌아온 이녹, 그는 친구였던 필립의 집에 가서 자신의 아내가 필립의 아내가 되어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을 창문으로 목격한다. 그 행복을 보고는 참을 수 없어 밖으로 나와 이녹은 신에게 이렇게 기도하는데....

 

너무나 참기 어렵군요 왜 나를 데려갔던가요?

전능하신 신이시여. 구세주시여

외딴 섬에서 나를 지켜주신 아버지 당신이시여

이 외로움 속에서 나를 더 지켜주소서

더 도와주시고 힘을 주소서

그녀에게 말하지 않도록 알리지 않도록

그녀의 평화를 깨고 들어가지 않도록 하소서

우리 아이들에게도. 말하면 안 되겠지요?

애들은 날 몰라요. 내가 무너져서 말한다면?

안됩니다. 딸이 아빠에게 주는 키스 안 됩니다.

딸의 엄마, 그리고 내 아들도 말입니다.

 

자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리지 않을 수 있는 힘을 달라는 것이다. 그 후 이녹은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 1년 쯤 더 살다가 죽는다. 죽기 전에 그동안 친하게 지내왔던 노파에게 자기가 죽고 나면 아내에게 이녹 아든이 돌아왔다고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그 증거로 10여 년 전 가족과 헤어질 때에 아내가 잘라주었던 어린 자식들의 머리카락을 내놓는다.

 

테니슨이 쓴 《이녹 아든》이란 시 형태의 이야기는 서양의 고전인 호머의 《오딧세이》를 뒤집은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오딧세이는 트로이를 쳐부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그 때까지 애인인 페넬로페는 정절을 지키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녹 아든》에서는 여자가 기다리지 않고 끝내는 친구를 남편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이야기를 뒤집은 것이지만 그리이스 식의 막무가내의 순정과는 달리 이번에는 정말로 여자를 사랑한 한 남자의 애끓는 순애보가 우리를 울리는 것이다.

 

이 점, 애인을 되돌리지 못해 살인을 하고 자신도 죽는 이인화의 《시인의 별》과는 상황이 다르다. 이 두 소설적인 이야기가 모두 한 남자의 애끓는 사랑을 다루었지만 이인화의 것은 서양식의 결말이요, 오히려 서양인 영국의 테니슨은 동양식의 결말이라고 하겠는데, 작품으로는 반대로 남았다.

 

모든 사랑 이야기가 어찌 끝까지 참고 기다리고 용서하고 잘 사는 해피엔딩으로만 끝날 수 있을까? 그러나, 연꽃이 곳곳에 만발하는 7월의 아침에 생각하는 우리의 사랑은 비록 가슴 터지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사랑의 주인공이 모두 죽는 이인화의 사랑법보다는, 모두가 사는 테니슨 식의 사랑법이 더 좋아 보인다. 그것은 모든 것을 참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아무리 세상이 혼탁하고 어려워도 스스로의 고결함으로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연꽃의 그 덕성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리라. 연꽃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스스로 그렇게 꽃피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700년 전의 연씨가 다시 꽃으로 되살아난 것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 100년도 안 되는 인생이 너무나 짧다는 것을 새삼 느끼지만, 되도록 이 짧은 세상에서 서로 이해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살 수는 없을까? 그리하여 연꽃처럼 아름다운 꽃을 우리 서로가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맨날 남이 가진 것을 뺏기 위해 아웅다웅하고 때로는 싸우다가 살인도 하는 이 세상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