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우리문화편지

79년 전(1940년) 오늘 광복군 창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16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광복군은 한ㆍ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이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광복군을 창설하면서 창립 취지로 한 말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군대를 창설한다는 원칙하에, 1919년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大韓民國陸軍臨時軍制)」를 제정하였지만 임시정부가 여러 곳으로 피난처를 옮겨다니는 상황에서 실천에 옮기지 못하다가 겨우 1940년이 되어서 광복군을 창설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광복군 총사령부는 총사령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이 임명되었고, 총사령부 아래에 4개 지대(支隊)를 편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광복군은 병력 모집을 위해 대원들이 일본군 점령 지역으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지원병을 모았지요. 그 결과 광복군 창설 1년여 만에 3백여 명에 이르는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미ㆍ일 사이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는 12월 10일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또 김원봉(金元鳳)이 이끌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도 광복군에 편입했습니다.

 

또 임시정부는 자주독립 노선을 세계에 밝히고 광복군의 본토 진격 작전을 하기 위해 미국전략사무국(OSS)과 협약을 맺고 특무공작훈련을 실시하였지만 국내진공작전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실행에 옮기기 직전에 취소되어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김구 주석은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결국 이로써 미군정 당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광복군은 미군정 당국의 요구에 따라 무장을 해제한 채 귀국,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