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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책의 교류는 정보 이동의 기본

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行道] 함께 걷기 32

[우리문화신문=김광옥 명예교수]  세종의 사맛[커뮤니케이션]의 길에서 3번째는 정보의 교류다. 정보를 교환하다는 것은 새소식으로서의 뉴스와 과학 정보 그리고 사상을 교환하는 것으로 융합의 과정이다. 요즘 인터넷사회에서 기술은 복합 - 통합 - 융합의 과정을 거친다. 마찬가지로 사회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사물의 이동에 이어 인간의 이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정보 기술의 교환을 통해 사회의 융합을 이루게 된다. 세종시대로 돌아가면 정보의 유통 과정으로 사신의 오가기, 유학, 서한ㆍ 책 등의 유출입이 있다.

 

경연(經筵)에서의 사상 교환

 

사상의 교환은 사람끼리 서로 만나 의견을 교환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정치의 예비 작용으로서 경연과 윤대가 있다. 사람들이 모여 공식적인 형식을 갖추며 사적인 학업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경연은 《조선왕조실록》 모두 원문 12,470건 가운데 세종 2,011건으로 세종은 경연을 부지런히 그리고 꾸준히 한 인금이다. 실록 전체의 6분의 1에 이른다. 경연에서는 한 주제를 가지고 자유로운 토론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예비적 정책 논의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정보교류의 사신

 

사신은 사람의 교류이지만 동시에 정세와 정보 교류가 주목적이다. 중국은 당시 천문학, 의학, 물리학 등 자연과학에서 학문이 발전해 있었다. 세종은 3년(1421)에 상의원에 근무하던 장영실을 천문관 관리였던 윤사웅과 부평부사 최천구와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한다. 윤사웅과 최천구는 양반이었고 장영실은 노비였다. 천문과 역법에 관해 토론회를 열고 ‘중국의 물시계와 황실 천문기구의 모두 눈에 익혀와 모방하여 만들라’고 주문한 것이다.

 

이런 파견은 정치적인 행위가 아닌 사신단의 이름을 빌린 정보 취득 행위가 된다. 사신단 속에 연구팀이 끼어든 것이다. 그들은 중국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조선으로 돌아와 첫 물시계인 ‘경점기’(경점기는 밤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을 관리하기 위해 밤 시간을 5개의 경 그리고 다시 경을 5개의 점을 나누었고, 청동 항아리를 쌓아 만든 물시계의 일종이다.)를 만들었다.

 

그리고 세종은 '양각혼의성상도감(兩閣渾儀成象都監)'이라는 천문연구소를 설치하고 이들에게 더 큰 업무를 맡기기도 했다. 명나라와 아랍 이론을 바탕으로 이들이 제작한 기계가 바로 물시계요 해시계를 위시한 천문 관측기구들이다.(《연려실기술》 별집 15권 첨성(瞻星) 참고)  장영실은 기술을 더 발전 시켜 자동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게 된다.

 

* 금과 은의 제련: 세종 19년에 요동에 금과 은의 제련술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 이야기를 듣고 통사 김옥진(金玉振)을 시켜서 중국사람 지원리(池源里)와 김새(金璽) 등 7인을 요동으로 풀어 보냈다. 김새가 야인에게 포로가 되어서 오랫동안 북방에서 살다가, 도망쳐서 왔다. 김새가 여러 가공하는 일에 정교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금은을 제련하여 주홍의 가벼운 가루로 하엽록(荷葉綠)(하엽록이란 모자의 꼭대기에 다는 연잎 모양의 파란 장식물이었다) 따위의 물건을 만들 수 있다.’ 하였다.

 

김새가 말하기를, ‘돌멩이를 제련하여 금과 은을 만들 수 있다.’ 하여, 곧 그 말에 혹 해서 따라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널리 돌을 구해서 보이니, 말하기를, ‘모두 진짜 돌이 아니다.’ 해서, 끝내는 배우지 못하였다. 임금이 장영실에게 명하여 그 기술을 배워 익히게 하였으나 별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세종실록》 19/7/6) 다만 기술정보를 얻기 위해 애쓴 행적으로 남아 있다고 하겠다.

 

 

서한, 책 등 정보 유통

 

사물의 움직임을 밝히는 이론이나 원리로서의 지식 창고라 하겠다. 조선의 아악을 정리하는데 《율려신서律呂新書》가 큰 역할을 했다. 이 책은 중국 남송 시대에 만들어진 채원정(蔡元定)의 음악 이론서로 1415년 명나라 영락황제 때에 펴낸 아악보 《성리대전(性理大全)》에 수록되어 있었다. 이는 남송 시대에 쓰인 창의적인 악리(樂理)를 논한 음악 이론서이다. 중국 음악 조직의 기초는 12개의 절대음인 ‘12율’이다. 중국에서는 한(漢)나라 이래로 이른바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을 이용해 12율을 만들었다.

 

* ‘삼분손익’이란 어떤 음높이의 현 길이를 3분의 1로 줄이면 완전5도 위의 음을 내는 제2의 현이 되고, 제2의 현 길이의 3분의 1을 늘인 현은 제2의 현보다 완전 4도 아래의 음이 나온다. 이것을 순차적으로 거듭하면 12율이 된다.)


세종 1년(1419)에 《성리대전》을 수입하면서 《율려신서》도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고, 이후 조선의 아악을 정비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 향악: “임금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아악(雅樂)은 본시 우리나라의 성음이 아니고 실은 중국의 성음인데,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연주하여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鄕樂)을 듣고,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하면 어떨까 한다. (《세종실록》12/9/11)

 

《율려신서》등의 유입을 통해 음악에서 향악, 회례음악의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책의 교류는 정보 이동의 기본이 되어 있다.

 

* 사신회례 음악 : 임금이 맹사성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신 회례(會禮)에 여악(女樂)을 쓸 수 없다.’고 하니, 만약 여악을 그만두고라도 남악(男樂)이 족히 볼 만하면 가하거니와, 만약 음률에 맞지 않으면 어찌할까. 문무(文舞)와 무무(武舞)의 복색이 아마 중국과 같지 않은 듯한데, 그를 곁에서 보기에 어떨까.

 

 

중국의 풍류를 쓰고자 하여 향악(鄕樂)을 다 버리는 것은 단연코 불가하다." 하니, 사성이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과연 그러하옵니다. 어찌 향악을 모두 버릴 수야 있사오리까. 먼저 아악을 연주하고 향악을 겸해 쓰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문무와 무무의 의복 제도도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세종실록》13/8/2) 하였다.

 

세종은 음악의 이론은 중국의 연구를 참고했으나 그 이용에 있어서는 ‘우리 것’인 향악을 함께 이용하게 되고 음악 구성, 악기 등에서 우리 소리를 찾고자 했다. 정보교류를 통해 내가 서 있는 위치를 인식하는 자주 의식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