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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일본에 남은 사명대사 유정의 붓글씨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조 중기 임진왜란 때는 전국토가 유린되고 양국의 병사들이 각각 15만명씩 죽어갔고, 그 외 조선에서는 수십만명의 백성들이 죽어가는 최악의 국난시기였다.

 

이러한 억불과 국난 속에서도 깨달음과 자비를 삶의 목표로 삼아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자 했던 스님이 있다. 바로 사명대사 유정 대사다. 불교탄압 시대에 왕실과 조정에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오로지 일본의 무도한 침략에 당당히 맞서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승군을 이끌었던

사명당 유정스님은 전쟁의 마지막 시기에는 국왕의 특사로 외교에도 당당히 나섰다.

 

사명당 유정스님은 전쟁이 끝난 뒤 일본과의 강화조약에 일본의 담판상대로 아무도 나서지 않으려는 당시 상황에서 조선의 임금을 대신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인들의 모질고 다양한 시험을 보살승의 행적으로 다 이겨내고 오히려 일본인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사명당 유정스님은 강화조약이 마무리 된 뒤 일본 곳곳에 붙잡혀 갔던 전쟁포로들 1391명을 구해오고 약탈해간 많은 문화재도 함께 가지고 돌아왔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의 정승 판서들은 임금의 강력한 요구에도 아무도 강화에 앞장서 일본에 가지 않으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자 선조는 부득이 사명대사를 조선의 대표로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쓰고 있다. 그러나  때 마침 그의 스승이었던 서산대사 휴정스님이 입적하여, 그의 다비식을 위해 묘향산으로 가던 중이라 선조의 부름에 응할 수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스님은 개인적인 급한 일을 멈추고 임금의 부름에 응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명대사를 조선국의 강화대표로 파견하자 정승 판서 유생들은 벌떼같이 일어나 "유교의 중주국인 조선에서 어떻게 '중'을 대표로 파견할 수 있느냐"며 많은 상소문을 올렸다고 한다.

 

우여곡절 속에 일본에 파견된 사명대사는 교토에 머무는 동안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와 전쟁 후 처리를 위해 많은 협상을 하였고, 고쇼지를 창건한 승려 엔니료젠(1559 ~ 1619)과 선문답과 부족한 의문점은 필담으로 주고 받으며 엔니료젠 스님으로부터 지극한 스승 대접을 받았다.

 

사명대사는 그에게 허응(虛應)이라는 자를 지어주고, 아울러 도호로 무염(無染)을 지어주며 이를 직접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자를 써 주었다. 일본 스님 엔니료젠은 감격에 겨워 자신이 살아서 사명대사를 만나게 된 인연을 부처님의 큰 가피로 여겼으며 사명대사로부터 선사로 깨달음을 인정 받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며, 사명대사가 자신을 위해 짓고 써준 글귀와 편지글들을 자신이 창건한 고쇼지의 보물로 고이 간직해와 이번에 유묵전을 열게 된 것이다.

 

사명대사가 써준 엔니스님의 자인 허응(虛應)  밑에는 이 글을 쓰게된 연유를 추가하였고, 이와 함께 따로 글를 써 준다는 내용까지도 적었다. 또 자신은 선승으로 속세를 떠나 살아야할  승려지만 속세의 일에 10여년을 넘게 관여하며 살았고, 전후 일본과의 양국관계를 마무리 한 뒤 조선으로 돌아가 다시 선승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의지를 담아 한편의 시도 지어 주었다. 그 시는 고려말 문신 유숙의 시 "벽란도"에서 운을 차용하였다.

 

또 신라말 최치원이 지은 유명한 "윤주 자화사 상방에 올라"라는 시 중에 두 구절을 골라 일본 고쇼지의 풍광이 자화사처럼 탈속적이라는 뜻을 담아 이 글에 남겼다. 최치원의 시는 당시 시인 묵객들은 꼭 알아야할 유명한 시였다. 그 시의 내용은 각성중조모랑(角聲中朝暮浪} "나팔소리 들리고 아침저녁으로 물결이 일렁이는데, 청산영리고금인(靑山影裏古今人)청산의 그림자 속을 지나간 이 예나 지금 몇이나 될까?"

 

사명대사는 1604년 12월 부터 1605년 3월까지 교토에 머물며  일본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임진왜란의 전쟁에 대한 관계를 정리하고,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수립하였음은 물론 일본의 엔니료젠을 만나 불교에서 깨달음에 대한 선문답을 주고받으며 그 깨침의 경지를 인정하여 도호(무염)와 자(허응)를 지어주었고, 친필로 시도 내려주었다. 이런 일을 계기로 엔니는 일본불교계에서 고승으로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번 전시는 비록 그 작품의 수가 많지는 않지만, 사명대사의 친필유묵을 적국이었던 일본에서 이렇게도 귀하게 여기고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후세를 살고 있는 입장으로 볼 때 참으로 감개가 무량한 일이었다. 이번 전시는 이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면 우리 평생에는 보기 어려울 뜻깊은 전시회라 생각된다. 살생을 금지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또 승군대장으로 적을 죽이는 전쟁에 참가하였고, 전쟁이 끝이 난 뒤로는 국왕을 대신하여 외교의 협상가로 큰 공을 세웠던 사명당 유정스님이 있었기에, 조선의 불교는 오랜동안 질곡의 세월 속에서도 결코 그 정신만은 살아 남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명대사는 1605년 조선으로 돌아와 해인사에 머물다 5년 뒤인 1610년 입적하였다. 억불의 험난한 시대에 그 부당함에 대하여 한 번도 불평하거나 불만을 갖지 않고 오로지 깨달음을 구하기 위한 수행승으로 보살의 경지에 올랐으며, 국난의 현실을 맞이하여 수행승의 한가함을 버리고 일어나 고통속의 백성들과 함께 하였으며, 그 끝 마무리를 위하여 홀홀 단신으로 원수같은 적국 일본으로 건너가 서슬이 퍼런 일본의 막부 정권과 담판을 하였다. 그가운데 그의 행적은 마치 전설처럼 남아서 일본인들을 감화시켰고, 돌아와 조선에서도 크게 그 공을 인정 받았다.

 

하지만, 평화롭게 살아가는 이웃나라를 침략하여 온갖 행패, 살육 그리고 약탈을 일삼았던 일본에 대하여, 사명대사는 그 잘못을 꾸짓기만 했지 그 잘못의 댓가로 배상을 받지 못하고 온 것은 아쉬움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당시에는 약육강식의 세상이었다지만, 바른 법이 있는 세상의 눈으로 본다면, 임진왜란의 뒷처리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과 같은 상항이라면 국교 정상화 이전에 무도하게 일으킨 전쟁에 대한 응징과 그 피해 대한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아쉬움도 크다.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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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